제15장
하늘 저편이 살짝 밝아오는 새벽, 저택 고용인들이 슬슬 깨어날 무렵 서지훈은 정신을 잃은 강아영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점심이었고 안지은과 시어머니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영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김선애가 걱정스레 물었다.
고개를 저은 강아영은 잠자리 한 번 한 걸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는 사실이 창피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머님, 저 배고파요.”
“그래, 그래.”
대답한 김선애가 다급하게 병실을 나서고 그제야 안지은이 확 다가오며 물었다.
“너 뭐야. 섹스를 한 거야 고문을 받은 거야. 무슨 애가 기절까지 해.”
그녀의 질문에 강아영은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어젯밤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강아영, 넌 정말 짜증 나는 여자야.”
“그러게. 이게 무슨 고생이래.”
“너 지금 웃음이 나와.”
안지은이 안쓰러워죽겠다는 표정으로 온통 울긋불긋한 그녀의 몸을 쓰다듬었다.
“다 내가 자초한 일이지 뭐.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아 결혼한 대가랄까?”
강아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벌을 받아도 걔가 받아야지. 솔직히 먼저 다가온 건 서지훈이잖아. 안 그랬으면 네가 그 남자한테 빠질 일도 업었고...”
역시 한숨을 내쉰 안지은이 강아영을 끌어안았다.
“이제 그냥 마음 접어. 서지훈 그 남자 진짜 최악인 것 같아.”
“접었어.”
‘이혼을 마음 먹은 이상 안 좋아하기로 마음 먹었는걸.’
두 사람은 계속하여 어젯밤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서지훈은 그녀가 장선자를 사주해 꿀물에 뭔가를 탔다고 확신했고 그녀가 아무리 해명해도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네 시어머니가 하신 건 아닐까?”
“그럴 분은 아니셔.”
강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대체 누굴까?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이혼까지 하려는 마당에?”
...
월요일 오후까지 입원해 있는 동안 서지훈은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고 안지은은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아영 씨, 들어가도 될까요?”
주하진의 목소리였다.
“들어오세요.”
문을 연 강아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양 비서님한테 물었어요. 퇴원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얼굴을 붉히던 주하진은 등 뒤에서 또 분홍빛 장미꽃다발을 꺼냈다.
“퇴원 축하해요, 아영 씨.”
“왜 또 분홍 장미예요?”
“그냥 이 꽃만 보면 아영 씨가 생각나요. 화려한데 고급스럽고 특히 예쁜 모습이요...”
주하진의 말에 안지은이 웃음을 터트리고 그제야 그녀를 발견한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주하진의 대시는 너무나 강렬해 무시하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얼굴을 붉힌 채 칭찬의 말을 건네는 모습에서 왠지 과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진 씨, 솔직히... 제가 지금 여러 가지로 정리가 덜 끝났어요. 모든 게 다 끝나면 그때 우리 다시 진지하게 대화 나눠봐요. 네?”
그녀와 닮은 주하진의 진심을 짓밟고 싶지 않은 강아영이었다.
“네. 내일 지은 씨랑 같이 바닷가로 놀러 갈래요? 기분 나쁠 때 바다 보면 기분이 뻥 뚫리잖아요.”
강아영이 잠깐 고민하는 동안 안지은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퇴원한 강아영은 서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 법원 문 닫기 전에 이혼 수속을 마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집 문을 들어서자마 울음을 터트리는 김선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결혼을 강요했다는 건 알아. 그 일이 네게 한이 되었다는 것도 알아. 그런데 이런 일까지 우리가 계획했다고 생각하는 거니? 난 아영이 뜻 존중해 주고 싶었고 이혼하겠다는 말에도 결국 오케이했어. 그 마당에 나랑 그 아이가 그런 일을 꾸몄겠니? 아영이 평생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야. 누구보다 예의있고 바른 아이라고. 그런데 네가 약에 취해 그 애를 범하길 바랐겠어?”
‘아직도 화가 많이 났구나...’
어젯밤 거칠었던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며 강아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토록 사랑하는 이지원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면서도 육체적인 욕구를 잠재우지 못해 나한테 풀었던 거고...’
이 집안에 시집온 뒤로 남편 사랑은 못 받아도 시부모님 사랑은 분에 넘치게 받은 그녀였다.
오늘 그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하면 이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을 게 분명했다.
‘아니. 그냥 내가 했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두 분한테 내가 그렇게 악독하고 추잡한 여자라고 증명하고 싶은 거겠지.’
집안의 안녕을 위해 강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사주한 거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