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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순간, 고남연은 얼어붙었다. 윤북진 지금 자기가 뭘 하는지 알긴 하는 거야? 의아해하는 고남연에 윤북진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매일 애 낳자고 하더니 왜, 내가 시중 들어주길 기다리는 거야?” 정신을 차린 고남연은 손을 들어 윤북진의 병원복을 풀며 한 마디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는 해?” 윤북진은 가끔 고남연의 저 입을 바늘로 꿰매고 싶었다. 그리하여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옷은 아주 자연스럽게 벗기네.” 그러더니 화제를 돌렸다. “약 얘기는 내일 부모님 오시면 얘기해.” 윤북진의 손 옆에 있는 의자에 내팽개쳐진 고남연은 표정을 굳혔다. “윤북진, 이러면 재미없어.” 윤북진은 다른 건 몰라도 절대로 자신의 부모님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목숨이자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윤북진은 담담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내 밥에 약을 뿌릴 땐 왜 그런 걱정을 안 했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베개 밑에서 약을 하나 꺼내 고남연에게 던졌다. “이걸 먹든지 아니면 부모님들께 얘기하든지.” 윤북진이 내던진 약을 보니 설사약이었다. 고남연은 속에서 열불이 터졌지만, 분노를 참을 수밖에 없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 윤북진. 너 잘났다.” 병원에 며칠 입원하는 한이 있어도 고남연은 그녀의 어머니가 울며불며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약을 손에 쏟은 뒤 그대로 입에 밀어 넣었다. 고남연이 정말로 먹으려 하자 윤북진은 다시 한번 베개들 들어 그녀를 툭 쳤다. 손안의 약들이 흩어지며 고남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고 윤북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난 너같이 복수심이 강하지 않아서.” 고남연은 단박에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되는 거면 사실대로 말해.” 윤북진은 그에 차갑게 쳐다봤다. 고남연도 황급히 입을 쉿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실 안은 침묵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해영이 주문한 호텔 배달시킨 죽이 도착했다. 고남연은 그릇을 든 채 침대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먹여줬다. 윤북진에게 죽 한술 떠줄 때마다 고남연은 먼저 후후 불며 온도를 쟀다. 그러다 뜨겁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윤북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눈앞의 모든 건, 마치 그 싸움이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깊은 밤, 윤북진이 잠에서 깨었을 때, 방 안에는 무드등만이 켜져 있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고남연은 침대 가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2년! 벌써 2년이나 그녀를 이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윤북진은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그녀의 얼굴에 거의 닿을 때쯤, 그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춰버렸다. 그날 그녀가 했던 말을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화재와 명확한 증거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과거가 물밀듯 밀려오자 윤북진은 끝내 손을 고남연의 머리 위로 올린 채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그렇게 내가 미워? 날 죽이고 싶을 만큼?” 그저 그 한 번의 큰 화재를 겪었을 뿐이지만 그들은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었다. 그도 고남연이 바라는 대로 아이를 낳게 해줄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서로를 괴롭히고 힘들게 견뎌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퇴원할 때까지 윤북진은 고남연이 약을 넣었다는 일을 들춰내지 않았다. 윤북진이 퇴원할 때까지 챙겨준 고남연은 마침 휴가가 끝나 변호사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 남보다 못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날 점심 윤북진이 정부 기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자 하정준은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을 건넸다. 허정준이 서류를 내려놓자 윤북진이 물었다. “요즘 고남연 뭐해?” 계산해 보니 고남연이 찾아오지 않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하정준이 곧장 대답했다. “사모님께선 최근 일 때문에 바쁘십니다. 이혼 소송을 주로 맡으시더군요.” 마지막 말을 하는 하정준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낮아졌다. 들고 있던 서류를 툭 내던진 윤북진은 차갑게 냉소를 흘렸다. “미리 연습이라도 하겠다는 거군.” “…” 하정준은 쓴웃음만 삼켰다. 사실, 그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고남연이 왜 윤북진과 결혼했는지는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해오름 변호사 사무소, 회의실. 고남연은 재채기를 했다. 누가 자신의 뒷담화를 하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팀장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남연아, 나이도 젊으면서 왜 계속 이혼 소송만 맡는 거야?” 그렇게 말하더니 다른 동료들을 죽 훑었다. “다들 남연이가 어리고 경력 없다고 받기 싫은 소송 떠넘기고 그러지 마.” 고남연은 웃으며 말했다. “주임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미리 연습하는 거로 생각하고 있어요.” 윤북진과의 결혼이 얼마나 치열할지 아직 알 수 없으니 우선 마음의 준비라도 해볼 셈이었다. 그녀의 말에 주임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도 이럴 수는 없지. 이혼 소송은 앞으로는 웬만하면 적게 받아. 괜히 결혼 관념이 나빠질라.” 고남연은 이제 막 졸업한 지 일 년이 된 터라 주임은 그녀가 정말로 이런 소송에 영향을 받을까 봐서 걱정이었다. 고남연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주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남연아, 내가 미리 말했잖냐. 윤정 그룹에서 최근 법률 대리인을 바꾸려고 하는데, 네가 만약 윤정 그룹의 법무 대리인 계약을 따낸다면, 이 업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게 될 거야.” 최근 몇 년 동안 그들 사무소는 윤정 그룹의 법률 대리인 자리를 따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이며 모두 다 나서봤지만, 계약을 따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마침, 올해에는 새로운 사람도 있으니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게다가 고남연의 태도와 능력을 주임은 꽤 좋게 보고 있기도 했다. 고남연이 이 힘든 일을 거부할까 봐 주임은 이내 말을 이었다. “남연아, 괜히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회사에서는 꼭 따내라는 게 아니야, 그냥 최선만 다하면 돼.” 주임이 이렇게까지 말한 마당에 고남영는 더 거절할 수가 없어 알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윤정 그룹과 엮여야 할 것만 생각하면 고남연은 머리가 아팠다. 그리하여 밤에 집에 돌아와 부모님과 식사하다 두 사람이 윤북진에 관해 물을 때 그년 차갑게 반문했었다. “아버지, 윤해천과 합심해서 날 윤북진과 결혼시킨 거 말이에요. 도대체 절 도와주려던 거예요, 날 해치려던 거예요?” 고남연의 말아 고강현은 얼굴이 다 파랗게 질렸다. “얘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연히 널 위해서지. 게다가 점쟁이들 몇이나 네 사주는 반드시 윤북진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어. 안 그러면 자식은 전혀 없을 거라고.” 고남연은 고강현을 쳐다봤다. “윤해천이 아빠를 의심한 적 없어요? 그 점쟁이들을 의심한 적은요?” “그 점쟁이들 다 네 시아버지가 찾은 거야.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고.” “….” 이번 생에는 윤북진과만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다른 남자와는 임신도 출산도 못 하고 엄마가 될 수가 없다니. 전생에 윤북진과 무슨 원수를 진 건지 아니면 윤북진이 그녀에게 빚을 진 건지 운명은 이토록 두 사람을 단단히 엮어두고 있었다. 이보다 더 막장 같은 운명은 없었다. 옆에 있던 고남연의 어머니가 물었다. “강현 씨, 만약 남연이가 나중에 아이가 생겼는데도 기를 쓰고 이혼하겠다고 한다면 아이는 남연의 것이 될 수 있는 거야?” “해천이가 그랬어.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아이는 무조건 남연이한테 줄 거라고. 그러니까 남연이 너 지금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식을 낳는 거야.” “그래야지.” 고남연의 어머니가 말했다. “남연아, 들었니? 너 이 일 무조건 신경 써야 해.” 고남연이 대꾸했다. “아이, 아이, 아이, 제가 안 먹고 안 자는 한이 있더라도 윤북진과 아이를 안 가지진 않을 거니까 마음 푹 놓고 계세요.” 원래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았지만, 점쟁이 몇 명이나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하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앞으로 윤북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아이를 가져야 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있으며 아이를 낳을 거라고 거듭 확신을 준 뒤에야 고남연은 차를 타고 고씨 가문 본가에서 떠났다. 로얄 빌리지로 돌아온 그녀가 막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강정숙이 달려와 보고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오셨어요.” 가방을 걸려던 고남연은 순간 멈칫하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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