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유진 씨, 사모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때 배씨 가문의 집사가 다가와 정중히 말했다.
송유진은 한재혁을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선 후 송유진의 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게 되었다.
강희옥은 철저히 품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송유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손찌검까지 했으면서도 여전히 우아한 귀부인의 태도로 충고를 늘어놓았다.
“송유진, 넌 정말 날 실망시켰어. 처음엔 네가 다른 애들이랑 다를 줄 알았어. 최소한 내 아들을 잘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오늘 봐봐. 내 아들이 대놓고 다른 여자를 집에 데려와선 결혼을 하겠다고 떠들질 않나. 어처구니가 없구나.”
“우리 배씨 가문이 그런 집안 출신의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송유진은 알고 있었다. 강희옥 같은 명문가 사모님이 ‘가문’이라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렇기에 강희옥이 연지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조금도 의외가 아니었다.
송유진은 차분히 말했다.
“아줌마, 저와 도현이는 이미 끝난 사이예요.”
강희옥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끝났다고? 그럼 난 지원을 끊겠어. 오늘 이후로 우리 배씨 가문의 돈은 꿈도 꾸지 마.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송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미 강희옥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배씨 가문은 강성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집안이었다. 특히 강희옥은 아들을 법조계에 진출시키길 원했다.
하지만 가업을 잇는 것보다 공직이나 법조계에서 성공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세대에 걸쳐 흠집 없는 가문이라는 배경이 필수였다.
문제는 배도현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썽을 부려왔고 특히 사생활이 가장 문란했다. 성인이 된 뒤로는 임신을 핑계로 그에게 책임을 묻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강희옥은 강단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들 앞에서는 악역을 맡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송유진이 배도현과 얽히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뒤를 철저히 조사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통제가 불가능한 배도현도 송유진의 말은 잘 따랐다.
강희옥은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고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배씨 가문에 들어오는 건 네가 감히 꿈도 못 꿀 일이야. 하지만 네가 내 아들을 잘 다뤄주기만 한다면 우리 가문의 돈으로 네 집안 사업에 투자해 줄게.”
송유진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배도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거래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다. 강희옥이 뒤에서 배도현에게 송유진이 그를 돈 때문에 만나는 것뿐이라고 알려준 것이었다.
강희옥은 아들이 송유진에게 진심으로 빠질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송유진은 그런 그녀의 우려가 기우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배도현에게 미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배도현이 점점 냉담해지고 심지어 모욕적으로 대했을 때도 그녀는 묵묵히 참았다.
다행히 배도현은 비록 제멋대로 굴긴 했지만 법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희옥은 송유진에게 큰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배도현이 연지아를 집에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으니 강희옥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아들은 통제가 어려워도 송유진은 여전히 그녀가 쉽게 다룰 수 있는 상대였다.
“도현이 이번엔 진심이에요. 다른 때와는 달라요. 그리고 도현이는 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이건 아줌마도 알고 계신 사실 아닌가요?”
강희옥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자각은 있구나.”
송유진은 침묵했다.
강희옥은 말을 이어갔다.
“연지아라는 애 이미 조사해봤어. 내 아들에겐 어울리지 않아.”
송유진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을 막으려는 듯 강희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해외에서 뇌신경 전문의를 한 명 알아뒀어.”
송유진은 고개를 떨궜다.
강희옥은 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았다.
이 순간 송유진은 크게 갈등했다.
더는 배도현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
그 시각 주성윤은 한재혁과 함께 배씨 가문의 집에서 나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주성윤은 몸을 떨며 투덜거렸다.
“춥네. 눈이라도 올 모양이야.”
주성윤은 한재혁에게 말을 건네다 답이 없자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뭐 하고 있어? 무슨 생각에 잠겼길래 대답도 없냐고?”
하지만 한재혁은 여전히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버스 정류장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한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너 옷 벗어.”
주성윤은 순간 멍해졌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그제야 한재혁의 눈길이 느릿하게 주성윤 쪽으로 향했다.
“옷 벗으라고.”
이번엔 명확했다. 주성윤은 본능적으로 자기 양복을 꽉 잡으며 한재혁을 경계했다.
“한재혁, 나 여자 좋아해. 경고하는데 이상한 생각하지 마. 너 잘생기고 키 크고 다리 길고 복근도 있지만 난 여자 좋아한다고. 진짜야...”
주성윤이 혼자서 쉴 새 없이 떠들어댔지만 한재혁은 아무 말 없이 자기 양복을 벗기 시작했다.
이를 본 주성윤은 깜짝 놀라며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 진짜 경고한다! 이상한 짓 하지 마. 나 정말로...”
그 순간 한재혁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뻗어 주성윤의 옷을 벗기려 했다.
주성윤은 처음에는 완강히 버텼지만 한재혁의 진지한 태도에 결국 순응하며 말했다.
“잠깐만. 제발 먼저 말을 좀 해봐.”
한재혁은 그의 말에 냉소적으로 반응하며 주성윤을 툭 걷어차고는 투덜거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난 옷 가져다주라고 그런 건데.”
그러면서 자기 외투를 주성윤에게 던졌다.
주성윤은 손에 들린 외투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머쓱해졌다. 지금 당장 혀라도 깨물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한재혁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안 들려? 옷 가져다주라고.”
그제야 주성윤은 한재혁의 시선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혼자 쓸쓸히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한재혁의 외투를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송유진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잠깐만.”
주성윤이 다급히 불렀다.
송유진은 그 말을 듣고 멈춰 섰다.
“눈 올 것 같으니 감기 들지 않게 이거라도 걸쳐.”
그는 외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송유진은 잠시 외투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감염되나요?”
“뭐?”
“오빠 옷 입으면 감염되냐고요.”
“...”
그 말에 주성윤은 어이없어했고 욕지거리가 나올 뻔했다.
‘내 명성이 진짜 한재혁 때문에 망했구나.’
기분이 상한 그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건 한재혁이 헛소리한 거고 나는 굉장히 모범생이야. 심지어 첫경험도 아직 남아있다고.”
송유진은 그 말을 듣고 놀란 기색을 보였고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주성윤은 결국 한숨을 쉬고 외투를 그녀 품에 던졌다.
“이거나 받아. 나 간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그리고는 그녀가 대답할 틈도 없이 등을 돌려 떠났다.
송유진은 그를 붙잡아 거절하려 했지만 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외투를 품에 안은 채 버스에 올라탔다.
주성윤은 버스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재혁의 차로 돌아갔다.
그는 차창을 두드렸다.
창문이 내려가자 한재혁이 그의 옷을 던져주었다.
주성윤은 옷을 받아들고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정말 걱정되면 그냥 데려다주지. 이런 식으로 삥삥 돌릴 필요가 있어?”
그는 한재혁을 힐끔 쳐다보고 빈정댔다.
“여자 꼬시는 스킬이 이딴 식이면 나도 형 존경 못 해줘.”
“유진이 화가 나 있잖아.”
한재혁은 대꾸하고 나서 차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를 출발시키고 앞서가던 버스를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