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퇴직
이서아는 그제야 한수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건 저랑 인하 씨 사이의 내기예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표님까지 포함해서 모두 증인이라고요. 전 단지 내기대로 했을 뿐인데 뭐 잘못했나요? 말씀해보세요.”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온몸에 가시가 돋쳐있었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평소 차분하고 겸손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한수호는 그런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인하 씨는 절 모함했고 어쩌면 인하 씨가 줄을 건드리고서 저한테 뒤집어씌우려 했을지도 몰라요. 만약 증거가 없었더라면 전 오늘 절대로 누명을 벗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건데요? 당한 억울함을 풀겠다는데 뭐 잘못됐어요?”
이서아는 한수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혀 겁먹지도,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고객이 다쳤으니 무조건 책임을 물을 거 아니에요. 그럼 제가 가서 사과하고 배상하고 심지어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지도 몰라요. 그것에 비해 따귀 한 대 때리는 것쯤은 충분히 봐준 거라고요.”
한수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토록 날이 선 이서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의 이서아는 늘 고분고분했고 싸우는 걸 싫어했었다.
침대에 엎드려서 울던 백인하는 그녀의 말에 거의 자포자기했다.
“그래요! 제가 언니한테 누명 씌운 거 맞아요. 이 따귀는 맞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저도 그냥 이 일을 구실로 머리를 굴린 거지 줄을 건드리지 않았다고요. 그리고 영상 속에도 제가 줄을 건드린 건 찍히지 않았잖아요. 방금 그 말은 절 모함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언니를 모함하던 것과 뭐가 달라요?”
이서아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머리는 잘 돌아가네. 반격할 줄도 알고. 역시 한수호를 괜히 쥐락펴락한 게 아니었어.’
백인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전 그냥 대표님 곁에 있는 언니가 질투 나서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에요... 대표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속 좁게 이런 짓 해서는 안 됐었는데. 만약 서아 언니한테도 결점이 있고 완벽하지 않았더라면 대표님이 언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절 더 봐주실 줄 알았어요. 이런 생각이 비겁하다는 거 알아요. 대표님 옆에 먼저 있었던 사람은 서아 언니고 제삼자가 저라는 것도...”
한수호가 백인하의 말을 잘랐다.
“제삼자 아니야.”
이 말은 이서아에게 찬물을 끼얹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수호는 백인하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마음 아파했고 좋아했다.
백인하가 제삼자가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제삼자지. 그리고 그게 이서아고...
한수호는 이서아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여기까지야. 너도 인제 그만해.”
이서아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한수호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마치 3년 동안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처럼.
이렇게 지내는 게 이젠 너무 지겨웠다.
이서아는 고개를 들고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대표님, 저랑 스타 그룹과의 계약이 마침 딱 한 달 남았더라고요. 인사팀과 대표님 메일에 사직서를 보낼 테니까 한 달 후 계약이 만료되면 회사 나가겠습니다.”
그렇다. 더는 이 회사에 미련에 없었다.
아무도 이서아가 이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울던 백인하마저도 울음을 멈췄다. 피해자인 이서아가 그만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거 산재니까 병원에서 증명서를 뗀 다음 인사팀에 휴가와 산재 배상 신청까지 할 겁니다. 한 달 동안 출근 못 해요.”
새로운 사랑, 편애, 무시, 경멸 그리고 의심까지... 이서아는 더 참고 싶지 않았고 참을 이유도 없었다.
마지막 한 달 남았다고 해도 한수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