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충분히 매정하게 대하면 추재은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임세린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난 임세린보다 더 독하게 굴 것이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마이바흐 한 대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임세린?’
이 생각이 갑자기 고개를 불쑥 쳐들었지만, 바로 지워 버렸다.
‘그럴 리가 없어!’
난 몰래 이곳으로 왔으니 임세린이 알 리가 없었다.
돈과 정력을 낭비하며 나를 찾았다면 몰라도.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복수를 이어가기 위해 정력을 그런 바보 같은 짓에 낭비한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난 쓴 웃음을 지었다. 집으로 들어가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 무덤으로 정한 이 집에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난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추재은과 박겸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시간과 정력을 나 같은 쓰레기한테 낭비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들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이제 이사할 돈이 없었으니, 집에 박혀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원히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 바로 누군가가 집 문을 두드렸다.
박겸이 아니었고 추재은도 아니었고 유강우는 더 아니라 임세린이었다.
난 문을 열고 밖에 서 있는 임세린을 발견했을 때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다. 난 믿기 힘든 표정으로 임세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임세린은 문밖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세린은 내 반응이 불만스러운 듯했다.
“주환아, 우린 부부잖아. 그러니까 한마음이 돼야지,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난 그 말이 너무 우스웠다.
특히 임세린의 입에서 부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임세린은 우리가 부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줄곧 부부라는 명분으로 날 가두고 복수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야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싫었다. 임세린한테 잡혀 또 그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방에 갇히기 싫었다.
그리고 날 쫓아낸 사람은 임세린이 아니었나? 비록 내가 원하던 바이지만, 내 짐을 밖으로 던진 사람은 임세린이 맞았다.
난 반항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여자한테 어떻게 이런 힘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임세린은 날 집 안으로 밀었고 함께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나한테 키스했고 가느다란 손으로 내 몸을 만졌다.
내 벽은 무너졌다.
비록 창피한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임세린은 정말 예뻤고 내 몸도 아주 성실했다.
우리는 함께 몇 시간 동안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고 끝으로 임세린이 내 옷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내 품에 기댔다.
난 조심스럽게 임세린을 안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 모든 게 너무 당연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 일이 생각 났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머리처럼 내 마음에 찰싹 달라붙어 꿈틀거렸다.
“세린아, 나랑 결혼한 이유가 뭐야?”
그 말에 고양이처럼 온순하던 임세린은 몸이 갑자기 굳었고 나를 밀어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며 말했다.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지?”
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그냥 진실을 알고 싶어.”
비록 유강우한테서 임세린의 진짜 목적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야만 다음번에 민감한 얘기를 나눌 때 주동권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변명을 들었지만, 임세린의 눈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정리하고 물었다.
“강우한테서 들었어?”
내가 아니라고 하자, 임세린은 마치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건 술에 취해서 헛소리 한 거야.”
임세린은 내 말을 믿지 않았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부인하지도 않았다.
난 결국 또다시 그녀가 정성 들여 짠 복수극에 빠져 들었다.
난 나와 임세린이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짐은 가져오지 않았다.
다시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정말 자유를 원했다.
사실 그런 말은 정확하지 않았고 임세린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임세린은 내 짐을 모두 가져왔다.
난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난 방에서 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방은 이미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일부 인테리어도 새로 한 것 같았다.
하늘색은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색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색이 조금 무서웠다.
매번 기절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바로 이런 색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색상을 바꿔 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고 그저 많은 일들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세린은 아주 세심했고 내 물건을 거의 전부 가져왔다.
하지만 하나만은 예외였다. 그건 바로 내 노트였다.
노트에 적힌 내용은 예전에 내가 요리하면서 생긴 노하우라던가 혹은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들이었다. 대부분은 내 기분을 적은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오늘 임세연이 요리를 몇 입 먹었으니 다음에 더 많이 해야겠다던가, 혹은 임세린의 옷이 너무 예뻤다던가 등,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유치한 글들이었다.
‘됐어, 잃어버리면 말지, 뭐.’
어차피 중요한 물건도 아니었다. 비록 예전의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담은 노트이지만, 지금 보면 마음이 아픈 물건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2, 3일 동안, 유강우를 보지 못했다. 심지어 임세린은 매일 밤 10시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도 안에 담긴 물건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가장 아름답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썩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이 지난 후, 임세린은 또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난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지만, 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변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다 변하는 건 아니야.”
난 예전처럼 임세린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어제가 유강우의 생일이라 임세린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니 임세린은 내 옆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진단서 같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난 호기심에 그 종이가 뭔지 보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 임세린이 갑자기 눈을 떴다. 내 동작이 너무 커서 잠을 방해한 것 같았다.
“손에 든 거, 그거 뭐야?”
하지만 난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종이 위에 쓰인 큰 글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임신 검사 결과지.
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