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번엔 육진수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 웃음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 정리하고 반성한 줄 알았는데 이별로 협박하겠다?”
설인아가 얼마나 그를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했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육진수였다. 최근에도 여러 번 다퉜는데 그럴 때마다 설인아가 먼저 사과하면서 숙이고 들어왔기에 헤어지자는 설인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육진수는 오만한 표정으로 설인아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설인아, 내 인내심에는 한계라는 게 있어. 그 성질 내가 언제까지 참아줄 수 있다고 생각해? 이번에도 잘 반성하지 않으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육진수는 이 말만 던져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설인아는 육진수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덤덤하게 바라봤다.
함께한 시간이 10년이니 그만큼 추억들도 많았다.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운 설인아는 날이 어슴푸레 밝아와서야 잠이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린 알람에 시간을 확인하고는 얼른 준비하고 동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에 도착해보니 하시훈과 약속한 시간이 되려면 10분이나 남아있었다. 하시훈이 아직 도착하기 전이라 설인아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잘 쉬지 못해서 그런지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 뒤로 꼬꾸라지는데 누군가 힘껏 설인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놀란 설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확인해 보니 하시훈이었다.
“하시훈 씨?”
슈트를 입은 남자는 조각 같은 오관과 날카로운 턱선의 소유자였다. 예쁜 눈망울은 지금 덤덤한 눈빛으로 설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섹시한 입술은 오므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내가 너 쓰러지는 것만 벌써 두 번째 보고 있어. 미래의 설씨 가문 사모님이 그래서 되겠어?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네가 삥 뜯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겠어.”
설인아는 정말 너무 난감했다. 사실 어제도 동사무소 앞에서 하시훈을 만났는데 설연우와 육진수가 밀회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하마터면 쓰러질 뻔 하는 걸 하시훈이 부축해 줬다.
“하시훈 씨, 시간 되면 결혼할래요?”
설인아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하시훈네 집에서도 결혼을 재촉한다는 걸 설인아는 알고 있었다.
하시훈이 멈칫하더니 설인아를 10분은 족히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하시훈, 하씨 가문 넷째, 넷째 도련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씨 가문의 대권을 잡고 있는 하시훈은 하씨 가문을 업계 선두까지 끌고 올라간 공신이기도 했다. 하시훈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도 했지만 여자들에겐 꿈에도 그리는 존재였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업계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시훈의 어머니 김지애도 하시훈을 매우 예뻐했다. 요즘 들어 자꾸만 손주 하나 낳아달라고 성화를 부렸고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6개월 안에 결혼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하씨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생각하면 설인아는 충동적으로 행동한 자신이 너무 미웠다. 장난이라고 둘러대려는데 하시훈이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주민등록증을 안 가져와서 내일 10시에 여기서 보자.”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했다.
설인아는 동사무소 앞에 나와 있는 지금도 하시훈과 결혼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시훈이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그래도 현실감이 없었다.
하시훈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설인아를 보며 차갑던 눈빛에 웃음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아래로 늘어트린 하시훈이 갑자기 설인아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허리를 꼭 감싸며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어제는 하씨 가문 사모님 하겠다더니. 왜, 후회라도 하겠다는 거야?”
거리가 좁혀지자 향긋한 냄새가 설인아의 코끝을 가득 메웠다. 시야들 가득 메운 하시운의 얼굴에 후끈 달아오른 설인아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요.”
한 시간 후.
혼인 신고를 마친 설인아와 하시훈이 서류를 들고 동사무소에서 나왔다. 모든 수속을 마치긴 했지만 설인아는 아직 멍한 상태였다.
‘내가 하시훈 씨랑 결혼했다니. 하시훈 씨가 어떤 사람인데.’
설씨 가문은 하씨 가문과 견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파티에 참석해 대화를 나눠본 적은 있지만 그냥 스치는 인연에 불과했기에 하시훈은 설인아가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하시훈의 이름은 육진수, 그리고 설인아의 아버지에게서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말끝마다 하씨 가문과 연이 닿으면 얼마나 좋은지 늘어놓았다.
설인아가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하시훈을 바라봤다.
“하시훈 씨.”
“일단 타.”
설인아는 하시훈에게 이끌려 주차장으로 향했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하시훈은 일단 차에 시동을 걸지 않고 설인아를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 해봐.”
설인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전에 만나던 남자 친구가 있어요. 10년을 사랑했는데 어제 금방 헤어졌거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하시훈의 눈길은 여전히 설인아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설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 나는 지훈 씨 배신하지 않아요. 결혼했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에는 충실할 거예요. 하지만 내 과거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시훈은 그제야 표정을 살짝 풀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설인아도 얼른 안전벨트를 잠갔다.
“우리 지금 어디 가요?”
“너희 집.”
설인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우리 집이요?”
“짐 정리해서 신혼집으로 가야지.”
“신혼집?”
화들짝 놀라는 설인아와는 달리 하시훈이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엄마가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미리 준비해 뒀지.”
차가 떠나려하자 설인아가 얼른 하시훈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설인아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너무 갑작스럽게 결혼했잖아요. 나... 나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조금만 늦게 집안에 알리면 안 될까요? 그리고 내가 벌여놓은 일들 잘 처리해야 너한테 덜 미안할 것 같아서요...”
“그... 근데...”
하시훈이 아무 말도 없자 설인아가 당황했다.
“알아요. 이렇게 흔쾌히 결혼한 것도 다 어르신들 때문이라는 거. 만약 뒤에 가서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그러면 바로 이...”
이혼이라는 단어를 채 내뱉기도 전에 하시훈의 표정이 다시 얼어붙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설인아를 노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사전에는 사별만 있지 이혼은 없어.”
설인아가 다시 넋을 잃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확신에 차 있는지 궁금했다.
‘설마 신부가 누구든 결혼만 하면 된다 이건가? 뭐 나도 이제 사랑 따윈 믿지 않는데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이렇게 생각한 설인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면 내게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줘요. 정리되면 그때 다시 찾아갈게요...”
하시훈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너 이미 법적으로 내 와이프야. 그러면 나랑 같이 살아야지.”
“그... 그러면 일단 나 혼자 돌아가면 안 될까요? 주소 보내주면 오늘 밤 그쪽으로 갈게요.”
설인아도 더는 물러설 수가 없어 입장을 견지했다. 하시훈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양보했다.
“데려다줄게. 너 준비되면 연락해. 사람 보내줄 테니까.”
설인아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