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박시원이 집을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 송수아는 마침내 그가 가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처음으로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커다란 테라스에 석양이 조금씩 내려앉으며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도 저 하늘처럼 조금씩 어두워지며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솟아올랐다.
박시원이 전화를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송수아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박시원의 가족에게 다시 걸기로 했다. 하지만 갑자기 박시원이 고아였고 유일한 할머니도 몇 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떠올랐다.
휴대전화를 다시 켜고 주소록을 몇 차례 뒤졌지만 자신은 박시원의 친구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박시원의 방 문을 밀치고 안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문을 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박시원의 방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지만 집의 인테리어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성이 온화한 박시원의 방안에는 필요한 가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 이 방에는 갖가지 아름다운 액세서리, 가방, 그리고 갖가지 색상의 화려한 예복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방의 원래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막 가정부에게 누가 이 방을 건드렸는지 물어보려 할 때 허민준이 장미 꽃다발을 안고 계단을 내려왔다.
“수아야, 옥상에 장미꽃이 예쁘게 피었어...”
그의 말은 여자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 뚝 그쳤다.
“왜, 왜 그래?”
“민준아, 이 방의 원래 물건은?”
허민준은 분명히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빠르게 말했다.
“그것들은 시대에 뒤떨어져서 가정부들에게 모두 처분하라고 했어. 수아야, 너 화났어? 하긴, 여기는 너와 박시원 씨 집이니 당연히 너희가 주인이지 나는 남에 불과해. 아니면 나 그냥 갈까...”
나지막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고 눈시울도 순간 붉어졌다.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송수아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박시원은 울어본 적이 없는데.’
허민준이 집착이 심한 아내와 이혼하는 걸 도와주기 위해 송수아가 3개월째 귀국하지 않고 있는데도 박시원은 전화로 몸 챙기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허민준은 오랫동안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 송수아를 살며시 올려다보았지만 그녀가 방안을 노려보며 넋을 놓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입술을 깨문 채 부글거리는 화를 참았다.
귀국해서 그녀의 앞에 나타났고, 이젠 떠나지 않을 건데 그녀는 왜 아직도 박시원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억울했다.
억울한 표정을 지은 그는 나지막이 울며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고 박시원 씨 방에 묵지 말았어야 했어. 나 그만 가볼게.”
말을 마친 그는 품에 있던 꽃을 집어던지고 돌아서서 뛰어나갔다.
“민준아!”
송수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쫓아나갔다.
“놔, 나 그냥 보내줘.”
허민준은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긴 눈빛을 지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내가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에 폐를 끼치지 않았더라면, 박시원 씨도 화를 내지 않았을 거야...”
그가 발버둥 칠수록 송수아는 더욱 힘껏 허민준을 잡아당겼다.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 사람이 철이 없는 거지.”
“그 자식이 철이 없는 게 네가 너무 사랑해줘서 그런 거 아니야?”
허민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 그거 알아? 난 네 생각에 잠을 못 이룰 때마다 업계 사람들에게 너의 소식을 물어보지만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그 자식과 함께 있다는 것뿐이었어...”
말이 채 마치지 못하고 그는 또 울기 시작했다.
송수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왜 그 사람이랑 결혼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잘 알잖아.”
허민준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 때문이야?”
송수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최고의 묵인이라 허민준은 끝내 눈물을 거두었다.
그날 저녁, 송수아는 특별히 허민준에게 낭만적인 식사 자리를 예약해 주었다.
송수아는 평소에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허민준이 계속 잔에 따라줘 계속 마시더니 눈가까지 취기가 피어올랐다.
때가 되자 허민준은 그날 박시원이 준 이혼 합의서를 꺼냈다.
“수아야, 네가 전에 사준 별장에 추가 계약서가 필요해.”
송수아는 손을 들어 받았다. 그녀는 워낙 신중한 사람이라 서류를 펼쳐 자세히 보려 했지만 허민준이 그녀의 손을 덥석 누르며 합의서를 마지막 장으로 넘기고는 손으로 앞장을 눌렀다.
“수아야, 몸이 좀 안 좋으니 빨리 사인하고 들어가자.”
그는 곧바로 확인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그의 이마를 짚어보며 말했다.
“어디가 안 좋아? 병원에 데려다줄게.”
말을 마친 송수아는 서류를 접고 그의 손을 잡은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허민준의 눈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떠오르더니 얼른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서명만 하고 돌아가자.”
송수아는 그의 몸을 걱정하며 결국 서류를 더 보지 않고 허민준이 가리키는 위치에 맞춰 서둘러 사인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