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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곧이어 육지완과 김인우는 서지아를 데리고 송서윤의 옆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두 재벌 집 도련님들이 서로 앞다투어 서지아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주아린은 어이가 없어 스테이크를 갈기갈기 썰었지만 송서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에 주아린도 더 말하지 않고 분노를 삭였다. 잠시 후 두 여자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송서윤은 다시 한번 주아린과 작별을 고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도 육지완과 김인우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송서윤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마지막 짐 정리에 돌입했다. 아침에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래도 두 남자가 돌아온 듯싶었다. ‘돌아올 때도 됐지. 오늘은 새집으로 이사하는 날이잖아.’ 다만 오늘부로 그들의 새집에는, 그들의 인생에는 더 이상 송서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육지완과 김인우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밖에서 요란스럽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 송서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지막으로 짐을 한번 체크했다. 이때 김화영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가 연결되고 김화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아, 몇 시 비행기야? 우리 마중 갈게.” 송서윤은 티켓을 확인하고 나지막이 답했다. “저녁 7시쯤에 도착할 것 같아요.” 이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육지완과 김인우가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지금 누구랑 통화 중이야?” 김인우가 먼저 물었다. “네가 알 바 아니야.” 송서윤은 전화를 끊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녀의 싸늘한 태도에 두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지아가 나타난 뒤로 송서윤은 줄곧 그들과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육지완은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송서윤의 이상 행동이 자꾸 뇌리를 스쳐 저도 몰래 당황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무심코 말을 꺼냈다. “서윤아, 지아는 너랑 달라.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어릴 때부터 힘들게 살아왔잖아. 우리도 그래서 좀 더 챙겨줬을 뿐이야. 다른 건 없어.” 김인우도 잇달아 변명했다. “맞아. 우린 그저 지아가 불쌍해서 그랬을 뿐이야. 게다가 애초에 네가 먼저 지아를 우리한테 소개해줬잖아. 왜 이제 와서 질투하고 그래?” 송서윤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두 남자에게 되물었다. “나한테 이런 얘기 하는 이유가 뭔데?” 이에 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가 신경 쓰니까!” 그들 세 사람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여서 이젠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잘 안다. 송서윤이 입만 열면 뭐라 말할지 바로 알아챌 수 있고, 그녀가 손을 한번 휘두르면 뭘 하려는지 바로 눈치챈다. 그런 두 남자가 지금 그녀의 마음을 모를까 봐? 서지아를 엄청 신경 쓰고 있는 그녀인 것을. 다만 그런 송서윤이 점점 이해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견제하는 걸까? 한편 송서윤은 차가운 시선으로 두 남자를 힐긋 쳐다봤다. 마치 하찮은 두 인간을 쳐다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나 신경 안 썼어. 지아랑 친구로 지낼 거라며? 나도 너희들 친구인데 뭘 신경 써?” 순간 두 남자는 살짝 말문이 막혔다. 육지완은 한참 침묵한 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윤이 넌 알잖아. 내가 원하는 건 친구가 아니란 걸.” 김인우도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데? 우리가 정말 친구라고 생각해? 딱 거기까지인 거야?” 송서윤은 이들이 뭘 말하는지 너무 잘 안다. 두 남자 다 송서윤을 좋아하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지아를 위해서 기꺼이 그녀를 괴롭히는 게 지금 소위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이라면 송서윤은 당최 감당할 수가 없다. 그녀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린 또 다른 신분이 있긴 하지.” 곧 있으면 이들 세 사람은 친구 사이마저 깨질 테니까. 또 다른 신분이라면 낯선 이밖에 될 수 없다.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투에 육지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제 막 따져 물으려고 하는데 기사가 안으로 들어오며 그녀의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이때 송서윤이 기사를 가로막았다. “다들 먼저 출발하세요. 저는 혼자 가면 돼요.” 순간 김인우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 많은 물건을 너 혼자 어떻게 다 들어? 이제 그만 화 풀어.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사과하면 되지?” 다만 송서윤은 한사코 거부했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다들 가서 지아 좀 도와줘. 걔 혼자 살고 여자애라 연약해서 짐을 들 수나 있겠어? 걔야말로 너희들 도움이 필요할 거야.” 육지완은 이상야릇한 그녀의 말투를 바로 눈치채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이때 서지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완 씨, 인우 씨, 다들 이리로 와줄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서툴러서 뭘 제대로 할 수가 없네.” 가녀린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울려 퍼졌고 장내에 있는 모든 이가 똑똑히 들었다.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다가 송서윤의 단호하게 거부하는 눈빛에 끝내 먼저 자리를 떠났다. 통화를 마친 육지완은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아 혼자 힘들 것 같아. 내가 가서 좀 도와줘야겠어.” 김인우도 차 키를 챙겼다. “나도 같이 가.” 이제 막 집 밖을 나서려 할 때 육지완은 여전히 마음이 안 놓였던지 고개를 돌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서윤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는 거 알아. 레스토랑 예약했으니까 이사 마치고 우리 몇이 밥 먹으러 가. 지아 일은 나중에 잘 설명할게.” 송서윤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부랴부랴 집 밖을 나섰다. 떠나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나중에 설명해? 아쉽지만 우리에게 나중이란 없어.’ 게다가 그동안 육지완과 김인우가 했던 모든 짓을 되새겨보면 대체 뭘 어떻게 잘 설명한다는지 이해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이때 송서윤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도발로 가득 찬 서지아의 메시지였다. [미안해, 언니. 내 한 마디에 지완 씨랑 인우 씨가 바로 언니 버릴 줄은 몰랐어. 앞으로 우리 네 사람 함께 지낼 텐데 이쁘게 봐줘. 잘 부탁할게.] 송서윤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너희 셋이서 잘 지내면 돼. 난 굳이 끼어들 마음 없으니까.] 메시지를 전송한 후 그녀는 곧장 서지아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해버렸다. 그다음은 육지완, 마지막은 김인우였다. 리스트를 하나씩 비우고 세 사람은 앞으로 영원히 그녀의 인생에서 말끔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송서윤은 드디어 캐리어를 들고 무수한 추억이 깃든 이 집을 나섰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쿨하게 해성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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