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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윤아, 다름이 아니라 네가 어릴 때 집에서 대신 네 혼약을 맺어줬던 거 있잖아. 이제 병도 거의 나았겠다, 경주에 돌아와 결혼식 올리지 않을래?” “여전히 부담스럽다면 엄마가 아빠랑 상의해서 이 혼사를 취소할게.” 흐릿한 방 안, 송서윤 홀로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엄마 김화영은 딸아이가 이번에도 거절할 거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때 갑자기 송서윤이 입을 열었다. “네, 그럴게요. 돌아가서 결혼식 올릴게요.” 김화영은 놀란 마음에 멍하니 넋을 놓았다. “뭐? 끝내 동의한 거야?” 이에 송서윤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근데 일단 여기 해성시 쪽의 일부터 처리하고 보름 뒤에나 돌아갈 것 같아요. 엄마, 아빠가 저 대신 결혼식 준비 좀 해주세요.” 그녀는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는 순간,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누군가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아마도 육지완과 김인우가 서지아를 위해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는 듯싶었다. 이때 문밖에서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지아가 어느새 티라미수 케이크를 한 조각 들고 웃으면서 송서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청초한 얼굴에 사슴 같은 눈망울을 깜빡이며 활짝 웃었다. 풀 세팅한 메이크업에 살짝 묻은 크림이 조금 낯설게도 느껴졌다. “언니, 나랑 같이 내려가서 놀자.” 한편 송서윤은 그녀의 위선적인 몰골을 진작 눈치채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있어서 힘들 것 같아. 너희들끼리 신나게 놀아.” 순간 서지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언니 나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이렇게 거부하는 거야?” 송서윤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제스처도 없었는데 이 여자가 갖은 괴롭힘을 당한 것마냥 울먹이고 있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송서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는 더 이상 그녀의 수작을 지켜볼 마음이 없었다. “이런 쇼는 지완이랑 인우 앞에서 해. 나한텐 안 먹히니까.” 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서지아가 불쑥 문틈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언니, 그러지 마...” 문이 닫히는 순간 서지아의 손도 끝내 그 틈에 끼워버리고 말았다. 새하얀 손등에 파란 멍이 쫙 퍼졌다. “스읍...” 마침 위층으로 올라오던 육지완과 김인우가 이 모습을 보게 됐다. 두 남자는 거의 동시에 달려와 서지아를 품에 안고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김인우는 그녀의 손등에 난 흉터가 너무 안쓰러워 눈시울까지 빨개졌다. 원래 좀 욱한 성격이었던 김인우는 다짜고짜 송서윤을 질책했다. “야 송서윤! 지아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놀아야겠어? 너 대체 왜 이렇게 변했냐?” 한편 육지완은 성격이 차분한 편이지만 송서윤을 바라보는 짙은 눈동자에 여전히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지아 생일이야. 이건 네가 선 넘었어.” 곧이어 머리를 숙이고 서지아를 대할 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없이 다정한 말투로 바뀌어버렸다. “지아, 많이 아파? 가자, 내가 연고 발라줄게.” 육지완이 서지아의 손을 잡고 떠나자 김인우도 뒤따라가면서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지아야. 내가 새로 산 그 스포츠카 너 줄게. 파티 끝나고 나랑 함께 드라이브 가자. 바람 좀 쐬면 기분도 한결 나아질 거야!” 두 남자가 보물 다루듯이 애지중지하면서 어르고 달래자 서지아도 끝내 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말했다. “고마워, 지완 씨.”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서지아는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김인우를 바라봤다. “인우 씨, 레이싱 하지 마. 그거 위험한 거잖아. 늘 걱정된단 말이야.” 서지아가 드디어 미소를 보이자 김인우는 재빨리 맹세해댔다. “알았어. 우리 지아만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뭐든 다 할게!” 세 사람이 나란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송서윤은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오래전까지만 해도 저 두 남자 사이에 서 있던 사람은 그녀였으니. 송서윤은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고 천식을 앓고 있었지만 경주시가 하필 습하고 비가 많이 내려서 그녀의 병 치료에 적합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섯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경주시에서 해성시의 고모네 댁으로 이사 왔다. 이 도시는 사계절 내내 기후가 산뜻하다. 바로 그때부터 송서윤은 고모네 이웃인 육지완과 김인우를 알게 됐다. 셋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였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육지완과 김인우 모두 첫눈에 반해버리고 종일 그녀 옆에 붙어 다니며 흑기사가 되어주었다. 매일이다시피 그녀의 등하굣길에 함께해주었고 아침밥에 우유까지 챙겨주었다. 송서윤이 받은 연애편지는 죄다 찢어버리고 그 어떤 남자애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차단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 한 명은 가업을 물려받아 그룹 총수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세계적인 레이서로 거듭났다. 두 사람 모두 다망하게 보냈지만 송서윤의 양옆 집을 사서 벽을 뚫고는 그녀와 함께 지냈다. 또한 매일 집에 돌아와 그녀에게 밥을 차려주었다. 게다가 송서윤이 병이 거의 나아서 가족들이 경주시로 돌아오라고 다그칠 때, 두 남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떠나가지 말라고 애원했었다. 기어코 경주에 돌아간다면 두 사람도 현재의 모든 걸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 송서윤이 있는 곳이 바로 집이라는 말, 두 남자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송서윤은 몸 상태가 안정된 후에도 줄곧 경주시에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지아가 나타난 뒤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녀는 송서윤이 키운 인턴이다. 입사 첫날, 서지아는 쭈뼛거리면서 동료들과 함께 점심 먹으러 내려가지 못했고 그 뒤로 매일 그런 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송서윤이 구석에서 홀로 밥을 먹는 그녀를 발견하고 자세히 묻고 나서야 알게 됐다. 서지아는 지방에서 명문대에 입학했고 가정환경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최대한 돈을 아껴 쓰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우월한 환경에서 자라온 송서윤은 이런 사연을 듣게 되니 내심 그녀가 안쓰러워 착한 마음에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가끔 육지완, 김인우와 함께 밥을 먹을 때도 서지아를 데리고 나갔다. 바로 그 연유로 서지아는 육지완과 김인우를 알게 됐다. 차가운 성격의 육지완은 이토록 시끄러운 파티가 딱 질색이지만 지금은 서지아를 위해 관례를 깨고 있다. 또한 레이싱이 인생의 전부인 김인우는 그 누구의 권유도 안 듣더니 서지아가 홀가분하게 내뱉은 한마디에 바로 포기했다. 한 달 사이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이전에 두 남자는 송서윤을 향한 호감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그녀더러 둘 중 한 명을 고르라고 다그치면서 아수라장을 벌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송서윤은 진심으로 두 남자에게 설레면서 둘 중 한 명으로 골라볼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다만 지금은 부모님이 정해주신 결혼 상대와 웨딩마치를 올리려고 한다. 이 또한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닌 듯싶었다. 송서윤은 입술을 앙다물고 휴대폰으로 이별 카운트다운을 설정했다. ‘오늘부로 더는 너희 세 사람을 방해하는 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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