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잠시 후, 서찬미는 하얀 드레스로 갈아입은 채 어두운 안색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박시언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방금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는데 다정이 언니 본 것 같아요.” “신다정?” 서찬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다정이 언니가 저번에 그 남자와 같이 있는 거로 봤는데 두 사람 사이가 아주 각별해 보였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박시언의 표정을 관찰하더니 이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 다정이 언니가 어떻게 지태준 같은 사람과 친하겠어요... 게다가 지태준 그 사람은 아주 무법자라던데.” “신다정 이 여자가 진짜...” 박시언의 말투는 순간 차가워졌다. 지난번에 그는 이미 지태준이 신다정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겁도 없이 지태준 같은 무법자와 친하게 지내? 박시언의 마음은 왠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신다정은 자기를 바라보는 불쾌하고 의심스러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너 방금 뭐했어?” 박시언은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나? 나 화장실 갔지.” 신다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찬미는 신다정에게 다가가 일부러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언니, 저 방금 다 봤어요. 지태준 그 사람 좋은 사람 아니니 속지 않게 조심해요.” 신다정은 불쾌하다는 듯 손을 빼버렸고 서찬미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언니, 저 일부러 일러바친 게 아니라... 지태준 그 사람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지태준 씨가 어떤 사람인 지는 내가 판단해요.” 신다정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저...” 서찬미는 입술을 깨물고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박시언도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찬미도 너 좋으라고 하는 소리야. 주제 파악 좀 하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마.” 그러자 서찬미는 그만하라는 듯 박시언의 소매를 잡아당겼는데 그 모습은 마치 사이좋은 부부처럼 보였다. “아무튼 언니, 지태준과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언니는 교양 있는 명문가 딸이지만 지태준은 교양 없는 야만인과 같아요. 그러니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아요.” ‘쿵--!’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지팡이를 내리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백발의 노인이 로비 정중앙에 서 있었다. 신다정은 왠지 그 노인이 굉장히 눈에 익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그 노인이 바로 아까 꽃병을 깼던 그 정원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인은 양복과 가죽 구두로 갈아입고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는데 눈빛은 엄숙하고 날카로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 “이분은 바로 지 회장님이십니다.” 옆에 있던 경호원의 소개에 사람들은 모두 공손하게 노인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이때, 오직 서찬미만 어두운 안색으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했다. 아까 그녀가 무례하게 굴었던 상대가 바로 지 회장이라니! 그리고 이내 지 회장 옆에 지태준이 나타나지 회장의 팔을 부축했다. 순간 신다정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지태준은 신다정을 향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여기에 초대한 건 이 지정호의 손주이자 우리 지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지태준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지 회장은 서찬미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는데 그 눈빛에 서찬미는 저도 몰래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지 회장은 싸늘하게 말했다. “태준이는 교양이 없는 야만인이 아니야!” 장내의 모든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신다정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니야. 타임라인이 잘못됐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