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순간 세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흐르고 한참 뒤에야 지태준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다정 씨, 사람 함부로 오해하면 안 되죠.” “그러니까요! 우린 아주 깨끗한 장사꾼이라고요!” 반지훈이 진지하게 말했다. “깨끗한 장사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박시언이 들었으면 아주 솔깃할 거예요.” 신다정은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명문가 딸이지만 박시언은 달라요. 만약 아까 그 말들을 박시언에게 들려준다면, 박시언은 아마 관심이 많아질 거예요.” “우와, 이 여자 아주 음흉한 여자네?” 반지훈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신다정은 지태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1조 6천억 빌려주면 3년 뒤 원리금까지 갚을게요.” 그러자 반지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장난해요? 그게 이자만 얼만지 알아요? 그러다 못 갚으면 우린 완전 나가리 되는 거라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박 대표 부인을 어찌할 수도 없고.” “이자 얼만지도 알고요, 계약서 쓸게요. 만약 약속대로 돈을 갚지 못한다면 내 명의로 된 부동산과 주식 다 넘기고 평생 일 해줄게요.” 신다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계속 말했다. “게다가 나와 박시언의 혼인은 아마 3년을 초과하기 힘들 거예요. 설령 3년 뒤에 내가 계속 그 사람 부인이라고 해도 절대 내 편드는 일은 없어요.” 그 말에 지태준은 잠시 고개를 들어 신다정을 바라봤고 반지훈은 뭔가 흥미로운 냄새를 맡은 듯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반지훈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그래도 안 돼요! 난 절대 찬성할 수 없어요!” 반지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옆에서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빌려 드릴게요.” “뭐라고?” 반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 “너도 같이 미친 거야?” “재무팀에 바로 얘기할 테니 계약서는 추후에 작성하도록 하죠.” “지태준, 이 자식이 진짜!” 반지훈은 메뚜기처럼 펄쩍 뛰며 화를 분출했다. “고마워요, 지태준 씨.” 신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러면 연락 기다릴게요. 좋은 협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신다정은 밝은 표정으로 대표 사무실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후 반지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물었다. “와! 핵폭탄을 던져놓고 저렇게 간다고? 1조 6천억? 네 대가리에 빵꾸났어? 저 여자 박시언 와이프야. 근데 왜 빌려줘?” 지태준은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예쁘잖아.” “늬미! 네가 여자 꼬시는데 돈은 왜 내가 써?” 지태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은행 카드 한 장을 반지훈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내가 찍은 여자에게 지참금은 당연히 내가 줘야지.” “뭐? 지참금? 저 여자 박시언 와이프야. 근데 뭔 뚱딴지같은 지참금 타령이야?” 지태준은 반지훈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대표 사무실에서 나왔다. “저거 아주 돌아도 제대로 돌았어.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같은 시각, 별장에 들어서는데 거실 의자에 앉은 박시언의 모습이 보였다. 신다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생에 박시언이 이 집에 발을 들여놓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자기가 집에 들어오기 좋아했다고. 신다정은 단지 그가 잠시 집에 들른 거라고 생각했기에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바로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박시언이 입을 열었다. “신다정!” 신다정은 발길을 멈추고 물었다. “할 말 있어?” 신다정의 싸늘함에 박시언은 저도 몰래 기분이 불편해졌다. “경매 주최 측에서 빨리 돈 입금하라고 찾아왔었어.” “알아.” 박시언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말해도 돼.” 하지만 신다정은 여전히 쌀쌀맞게 대답했다. “됐어. 이미 해결했어.” “돈 어디서 났어?” 2조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박시언은 신다정의 손에 있는 신정 그룹의 그까짓 유동자금으로는 절대 그 큰돈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여 그녀는 절대 한꺼번에 그 많은 돈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건 내 일이니 당신은 신경 꺼.” “신다정, 나 네 남편인 걸 잊었어?” 신다정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 그녀의 남편이라는 걸 수치로 여기던 양반이 갑자기 남편 행세를 한다고? “내가 그 2조 때문에 한성 그룹에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서 그래?” 박시언은 침묵했고 그 침묵에서 신다정은 자기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 시언 씨한테 폐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아. 우리 결혼은 비즈니스니까 당신이 잘되면 나도 잘되는 거고, 당신이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잖아. 그러니 집에 자주 들리지 않아도 돼.” 박시언은 할 말을 잃었다. 박시언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여 결혼 후 신다정을 냉대했고 심지어 그녀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다. 신다정의 입으로 이 일을 들었을 때, 그제야 박시언은 그동안 자기가 너무 매정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박시언이 뭔가 말하려는 그때, 신다정의 휴대폰에 송금 알림이 떴다. 그녀는 지태준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생각도 못 했다.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1조 6천억이 입금되었다. 일이 해결되자 신다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박시언은 입술을 오므리더니 문뜩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 신다정은 항상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저런 미소를 지었지만 그는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었다. “저녁에 파티 있으니까 같이 가자.” “나?” 위층에 올라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신다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박시언이 되물었다. “싫어?” “파티 가는데 왜 서찬미와 같이 안 가?” 신다정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 기억에 따르면 지난 생에 박시언은 모든 공식 석상에 반드시 서찬미를 데리고 참석했다.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면 오늘은 국제 만찬이다. 지난 생에 그녀는 박시언에게 몇 번이고 함께 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매번 서찬미와 함께 참석하며 그녀 유학의 길에 꽃길을 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장소에 왜 서찬미가 아닌 나를? “한성 그룹의 사모님은 너야. 그러니 당연히 너와 함께 가야지.” 하지만 신다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마 서찬미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바쁜 스케줄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 이런 장소에는 많이 참석해야지. 창업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인맥이다. “그래, 준비할게.” 신다정이 승낙하자 그제야 박시언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적어도 신다정은 명의상으로라도 한성 그룹의 안주인인 걸 거부하지 않았고 또 그에게 완전히 실망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같은 시각, 서찬미는 기숙사에서 박시언이 비서를 통해 보낸 드레스를 자랑하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찬미야, 너 남자 친구 정말 짱이다. 또 이렇게 예쁜 드레스를 보냈네.” 서찬미는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찬미야, 우리한테 남친 언제 소개해 줄래?” “그러니까. 네 남자 친구 돈도 많고 맨날 너 데리고 파티나 참석하잖아. 우리 진짜 너무 궁금하다고!” 그러자 서찬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자리 못 비워. 나중에 기회 되면 너희들한테 소개해 줄게.” 이때 마침 서찬미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시언의 비서인 이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그녀는 너무 좋아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전화를 받았다. “이 비서님, 대표님이 보냈죠? 저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서찬미 씨, 대표님이 오늘 서찬미 씨는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