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박시언은 신다정에게 정신이 팔려 서찬미의 활약에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경매가 끝나고 자리를 떠나려던 신다정은 마침 박시언과 서찬미와 마주쳤다.
“신다정, 부동산에 대해 잘 모르면 그냥 잠자코 있었어야지.”
박시언은 신다정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러자 서찬미도 옆에서 한 소리 거들떴다.
“그러니까요, 다정 언니. 대표님 2조나 손해 보게 생겼어요.”
그러자 신다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서찬미 씨, 내가 산 땅이 시언 씨와 무슨 상관이죠?”
서찬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2조 원이에요...”
“그깟 2조 원은 우리에게도 단지 화장실 하나 짓는 돈이에요. 하물며 신다정 씨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멀지 않은 곳에서 반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다정 씨, 그렇죠?”
신다정은 반지훈 옆에 있는 지태준을 힐끔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2조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그 말에 서찬미의 안색은 점점 더 굳어졌다.
박시언에게 2조는 큰돈이 아니었고, 신다정에겐 더 보잘것없는 돈이다.
서찬미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고작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다.
이때 지태준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박 대표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옆에 있는 이 아가씨가 부인이야?”
그러자 서찬미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말했다.
“아니... 아니요...”
“여기가 내 부인이야. 신다정.”
박시언은 신다정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신다정은 박시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힘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박시언은 지태준의 시선이 신다정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는 남자가 가장 잘 안다고 박시언은 한눈에 지태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아, 신다정 씨가 부인이었어? 내 정신 좀 봐. 난 아까 박 대표가 이 아가씨와 다정하게 얘기 나누길래 이쪽이 부인인 줄 알았지 뭐야.”
그러자 반지훈이 자기 머리를 콩 내리찍으며 말했다.
“아, 그러면 박 대표 비선가 보다. 어쩐지 옆에서 계속 번호판을 들어주더라고.”
신다정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비록 그녀는 서찬미와 박시언에 더는 신경 쓰지 않지만 그래도 반지훈의 말에 속이 시원했다.
서찬미의 붉으락푸르락한 안색에 박시언이 분부했다.
“이 비서, 찬미 집에 데려다줘.”
“네, 대표님.”
그러자 반지훈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은 시간 방해하지 않을게. 나중에 보자.”
반지훈과 지태준이 떠난 후, 그제야 신다정은 박시언의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그만 잡아도 되지 않아?”
박시언은 그녀가 자기 손을 뿌리칠 줄 생각도 못 했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그와 살이라도 닿으려고 안달 났고 심지어 껌딱지처럼 따라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밤의 신다정은 예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결국 박시언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내 관심 끌려고 이러는 거라면 애쓸 필요 없어.”
그 말에 신다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반박하고 싶은데 도무지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예전에 박시언을 미친 듯이 사랑했던 신다정이라면 확실히 그의 관심을 끌려고 이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결국 신다정은 아예 반박하길 포기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잠깐만.”
“뭔데?”
“너 지태준과 어떤 사이야?”
“어떤 사이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야.”
그러자 박시언은 쌀쌀맞게 말했다.
“신다정, 똑바로 들어. 네가 그 자식과 어떤 사이든 상관없지만 밖에서 넌 내 부인이야. 그러니 네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다른 남자와 거리 지켜.”
박시언의 말에 신다정은 웃음이 터졌다.
“시언 씨, 나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당신이나 똑바로 행동해. 오늘 서찬미를 여기 데리고 왔을 때 당신은 이미지 생각했어?”
“이 비서를 통해 너한테 알렸잖아.”
“그래? 나한테 오라고 알렸어?”
박시언은 침묵했다.
이건 확실히 박시언의 잘못이 맞았다.
신다정이 말했다.
“지태준이라는 그 사람도 당신 부인이 내가 아닌 서찬미라고 생각할 정도니 다른 사람은 더 어떻겠어? 만약 서찬미가 그렇게 좋다면 우리 그냥 이혼해.”
“신다정, 미쳤어?”
박시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그는 신다정에게 애정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이혼하려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이건 두 가문의 이익을 위한 비즈니스 결혼이기에 한 사람이 끝내자고 해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다정은 박시언의 진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때만 해도 박시언이 그녀와의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이유가 바로 신정 그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녀가 모든 가치를 잃었을 때, 박시언은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그녀를 버릴 것이다.
전생의 처참한 최후를 생각한 그녀는 차라리 지금 끝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이혼하자고.”
다음날, 신다정이 2조를 들여 폐지를 샀다는 뉴스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신정 그룹의 딸이자 소유자로 2조는 비록 큰돈이 아니지만, 신정 그룹은 수많은 산업을 운영하고 있기에 급히 쓸 수 있는 유동자금은 별로 많지 않았다.
2조, 작은 액수가 아니다.
신다정은 침대에 누워 미간을 문질렀다.
박시언한테 부탁해?
아니야.
어제 그녀가 박시언에게 이혼 제안을 했을 때, 그는 가차 없이 뒤돌아 가버렸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신정 그룹의 재산을 그에게 양도하겠다고까지 했는데도 이 빌어먹을 놈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시언이 아니면 누구한테 손을 내밀지?
갑자기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있다!
“지태준!”
상류사회는 하나의 울타리라 신다정은 이내 지태준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
신다정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태준의 세력은 전부 해외에 있는데 그는 지난 2년 동안 해성시에서만 사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지태준은 빠르게 해성의 대기업을 점령하고 박시언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지성 그룹 회의실.
지태준은 아무 말 없이 손에 들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고 신다정은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1조 6천억만 빌려줘요.”
“풉--”
반지훈은 마시던 물을 그대로 내뿜었다.
직설적인 사람은 많이 봤지만 이 정도로 직설적인 사람은 처음 본다.
“신다정 씨, 금액이 너무 크다는 생각은 안 해봤겠죠?”
신다정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아, 저번에는 분명 화장실 하나 짓는 돈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아니 그건 신다정 씨 체면 세워주느라고 했던 말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은혜를 이렇게 갚아요?”
반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예쁜 여자는 하나같이 또라이다.
이때 라이터를 돌리던 지태준이 불쑥 물었다.
“내가 왜 그 돈을 빌려줘야 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4천억이면 낙찰받을 수 있었던 땅을 지태준 씨 때문에 억울하게 1조 6천억을 더 날리게 됐어요.”
“그런 이유라면 충분하지 않아요.”
신다정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지태준 씨 산업은 전부 해외에 있는데 지난 2년 동안 해성시에 자주 나타났죠. 아마도 해외의 검은 산업들을 해성시에 옮겨서 세탁하려는 생각이 아닐까요?”
물을 마시던 반지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본능적으로 지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정 그룹 아가씨가 이런 것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