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강서우의 한마디에 거실 안의 소란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
이신 그룹 본사 빌딩은 미래 그룹보다 몇 배나 더 컸다.
오후 네 시, 강서우는 빌딩 꼭대기 층에 있는 대표이사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강서우가 결혼할 예정인 상대, 즉 불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이세빈은 책상 앞에서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그는 박민재와 다른 부드러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으니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백옥 같은 피부는 이목구비를 더욱 뚜렷하게 했고, 콧대 아래의 윤곽 뚜렷한 입술은 건강한 핑크빛이었다.
강서우가 너무 빤히 바라봤는지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순식간에 조금 전까지 뿜어내던 무해한 기운이 온데간데없이 뒤집히며 설명하기 어려운 위압감이 눈빛 깊숙이 배어났다.
‘아, 역시 냉정한 사람이었구나.’
“강채원 씨가 아니군요.”
이세빈의 중저음 목소리가 울렸다.
강서우는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세를 바로 세웠다.
“네, 저는 강채원이 아닌 강서우예요. 결혼하러 왔습니다.”
이세빈의 눈에는 잠시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그렇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오래된 기억 속 어떤 소녀의 모습과 강서우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예전에는 밝고 자유분방해 보이던 눈동자가 지금은 어딘가 기쁨을 잃은 것 같았다.
이세빈은 서류를 덮으며 낮고 유혹적인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강서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채원이가 이세빈 씨를 못마땅해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대신 온 거예요.”
사무실 문밖에서 노크하려던 비서 문석천은 잠시 굳었다. 강서우의 무례한 표현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이세빈은 소문 같은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강서우 씨는 괜찮고요?”
강서우는 살짝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건 서로 필요한 게 분명한 결혼이잖아요. 감정이 들어갈 자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싫어할 이유도 없죠.”
감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세빈은 순간 손가락을 조금 움츠렸다.
‘감정은 구름시에 있는 그 사람한테 있는 건가? 아니면 억지로 헤어지게 돼서 아직도 우울해 있는 건가?’
이세빈은 깊은 눈동자로 강서우를 천천히 훑었다.
그 안에 잠깐 요동치는 심경이 어른거렸지만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은 냉정했다.
“신분증은 가져왔나요?”
결국 강서우는 서경시에 도착한 당일 오후, 이제 막 처음 만난 데다가 불임이라고 알려진 이세빈과 함께 구청 직원이 퇴근하기 직전에 혼인신고를 마쳤다.
증명서를 손에 들고도 이게 현실인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박민재와 완전히 단절된 듯한 홀가분함이 마음 한쪽을 채웠다.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이세빈의 목소리에 강서우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받으며 서 있는 이세빈은 얼음같이 냉랭한 표정이었지만 휴대폰을 건네는 태도만은 제법 신사적이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이세빈이 가장 먼저 보낸 메시지는 시내 지도 파일이었다.
그 안에는 붉은 표식이 된 곳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도심의 초고가 펜트하우스, 쾌적한 교외 타운하우스, 그리고 강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별장 등이었다.
“원하는 곳으로 골라요. 선물이에요.”
여전히 담담한 말투였다.
감정 없이 각자의 이익만을 위한 결혼이라는 게 더욱 선명해졌다.
강서우도 거부감 없이 강성 그룹 사옥과 가까운 펜트하우스 하나, 그리고 강가에 있는 한적한 별장 하나를 골랐다.
어머니가 남긴 도자기들이 꽤 있어서 이곳저곳 예쁘게 배치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두 곳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세빈은 이미 전화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가 보여 주는 추진력과 이유를 묻지도 않는 신뢰가 강서우를 약간 놀라게 했다.
“두 채나 고른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강서우의 질문에 이세빈은 잔잔한 눈빛으로 강서우를 바라봤다.
“서우 씨가 말했잖아요. 저희 사이에 감정 같은 건 없고, 필요한 것만 취하면 된다고요.”
차분한 눈동자에 강서우가 비쳤다. 자신이 말이 틀렸냐는 표정이었다.
강서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가 꺼낸 말이 맞지만 박민재에게 일일이 보고하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늘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불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박민재의 문자만 보면 어디에 있다고 보고하는 습관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