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안 선생은 한의사였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임유나의 맥을 짚으며 정색했다.
잠시 후 숨을 돌리고 나서 손을 치우고 옆에 있는 향초를 힐긋 쳐다보았다. 이는 그가 만든 것으로 임유나를 깊은 잠에 빠뜨린 원흉이기도 했다.
“맥박만 확인하면 큰 문제는 없어요. 기력이 좀 약할 뿐, 아마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탓이 커서 그런 듯싶네요.”
안 선생은 단어 사용에 유의했다.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강시후의 시선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한테서 떠나지 않았고, 잔뜩 찌푸린 미간도 유독 그녀만 보면 잠시나마 펴졌다.
심지어 호기심에 몇 번 더 쳐다보았다고 눈짓으로 경고까지 받았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섣불리 들지도 못 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고민하다가 큰마음 먹고 당부했다.
“향초는 너무 자주 사용하시면 안 돼요.”
그동안 노파심에 하는 경고에도 강시후는 안중에 없었지만 이번에는 가볍게 흘린 말에도 즉시 심지를 꺼버렸다.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린 강시후 때문에 안 선생은 향초를 제작할 때 대량의 수면제를 첨가했고, 그런데도 효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임유나 같은 일반인에게 즉시 적용되었고, 진정제 역할도 하는지라 가끔 사용하면 나쁘지 않았다.
말을 고분고분 듣는 강시후를 처음 보는 안 선생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남의 사적인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호텔을 나설 때 앞으로 드디어 고집쟁이 환자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 같아 내심 기뻤다.
임유나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나서 강시후는 한시름 놓고 계속해서 CCTV 영상을 지켜보았다.
플레이되는 내내 빨리 감기 한 적이 없었고, 그가 방을 나선 다음 청소 직원을 포함해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임유나가 나타난 이후 비록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행여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껏 꿍꿍이를 꾸며 일부러 그녀와 닮은 여자를 보낸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외모도 나날이 비슷하게 진화했다. 하지만 한 번도 속아 넘어간 적은 없으며 배후에 있는 자를 끄집어내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감히 같은 수법을 사용하지 못했지만 로엘 그룹의 경쟁사가 다시 그의 약점을 공략하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강시후는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임유나의 손을 얼굴에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다. 밤낮으로 그리던 얼굴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고요하고 깊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아직 아무런 허점은 찾지 못했고, 만약 고도로 설계된 사기극이라면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물론 강시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임유나가 진짜 돌아왔다고 믿고 싶었다.
...
깊은 잠에서 깬 임유나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껴안고 옆에 누워 있는 초췌한 강시후를 발견하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실종된 15년 동안 강시후와 아이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감히 예측조차 안 갔다.
“유나야, 좋은 아침.”
곧이어 깨어난 강시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옆에 있는 임유나를 보고 그제야 안심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웃는 모습은 처음 보지 않는가? 분명 예전에는 미소를 달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이내 머릿속으로 어제 아이들이 그를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굳이 ‘아이들’이라고 콕 집어 얘기한 것은 강도하뿐만 아니라 강로이와 강이안도 아버지와 트러블이 생겼다는 뜻이다.
비록 속으로 찝찝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고, 나중에 돌아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실 강시후도 임유나의 걱정을 눈치챘지만 차마 먼저 언급할 용기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관계가 멀어졌기도 했고, 녀석끼리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임유나는 3명의 자녀가 있으며 비행기 추락 당시 장남은 6살, 오누이 쌍둥이는 고작 2살이었다.
귀국하기 전에 강도하와 먼저 통화할까 고민도 했지만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떠올리면 결코 한 두 마디로 설명이 가능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에 일단 만나서 다시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장장 15년 동안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임유나가 힘들어하는 반면 인하시의 강도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열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본가 별장으로 향한 그는 마당에 다시 심은 다마스크 장미꽃을 발견했다.
이는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던 꽃으로 영통에서 봤던 여자가 이런 것까지 흉내 낼 줄은 몰랐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로 본가 별장은 15년 동안 변한 게 없었고, 심지어 꽃병조차 그대로였다.
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180도 달라졌다. 오래된 소파는 새것으로 바뀌었고, 계단은 재공사하고 카펫과 탁자도 교체되었다.
‘정녕 미친 건가? 고작 새로운 애인을 위해 엄마의 흔적을 싹 다 지워버리다니?’
강도하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동작 그만! 건드리지 마세요!”
집 안 청소를 하느라 여념이 없던 가정부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김 집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김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도련님, 대표님께서 지시한 사항이라...”
“무슨 지시를 내렸는데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도하의 목소리에 김 집사는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게다가 도련님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감히 거짓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별장 전체를 대청소하고, 정원에 다마스크 장미 심기. 그리고 3층 안방 먼지를 제거하고...”
그리고 빠른 속도로 굳어지는 강도하의 얼굴을 보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본가 가정부들이라면 3층 안방은 금단 구역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름 아닌 첫째 도련님의 모친이 지내던 방이라 여태껏 대표님만 출입이 가능했다. 심지어 청소도 직접 하셨기에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오늘 가정부에게 정리를 맡기고 다른 지시 사항에서 유추해보았을 때 다들 속으로 집에 곧 새로운 안주인이 생긴다는 사실이 뻔했다.
말을 마친 김 집사는 도련님에게 설명했으니 수수방관할 줄 알고 가정부에게 계속하라고 눈짓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귀가 멀었어요?”
강도하는 비록 마음이 너그러운 편이 아니지만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반감을 주는 행위는 절대 용납이 불가능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이사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대체 왜 어머니가 살았던 흔적까지 지우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게다가 그 여자는 단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옆자리를 꿰찬 게 분명한데 고작 이런 식으로 어머니의 모든 것을 빼앗아 대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꿈 깨!’
결국 김 집사는 가정부에게 청소를 맡기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강도하를 보자 속으로 패닉에 빠졌다. 어쩌면 대표님이 새로운 사모님과 함께 돌아오면 도련님이 한바탕 소란을 피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김 집사는 강시후에게 연락을 시도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잠시 후, 밖에서 차 소리가 문득 들렸다.
이내 김 집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었다.
‘오셨군!’
별장에 있는 가정부들은 찍소리도 못 냈고, 방 안의 온도가 금세 뚝 떨어졌다.
김 집사는 서둘러 밖으로 마중을 나갔고, 연두색 긴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발견한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10년 전 강씨 본가 저택에 취직한 이후로 비록 사진으로 사모님의 모습을 봤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의 외모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남자로서 아내를 위해 15년 동안 순정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하지만 새로운 안주인을 마주하는 찰나 아직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게 분명하다고 여겼다.
“대표님, 첫째 도련님이 집에 계시는데...”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하기도 전에 눈앞의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도하가 집에 있어요?”
임유나는 돌아오자마자 아들을 만나게 될 줄 몰랐는지라 잽싸게 강시후의 팔짱을 풀고 잰걸음으로 별장을 향해 뛰어가다시피 했다.
갑자기 허전해진 팔을 내려다보며 강시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곧이어 뒤를 따랐다.
김 집사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련님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 난 듯싶은데 왠지 망할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