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이때, 머릿속으로 문득 떠오른 말에 십분 공감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하루가 지나고, 눈을 감았는데 다시는 뜨지 못한다면 한평생이 지나가지.’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장장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자체가 도무지 납득이 안 갔다.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설마 도하랑 손잡고 몰래카메라 찍고 있는 건 아니지? 우는 척하기는! 하지만 분장은 꽤 감쪽같은데...”
그러나 말을 이어갈수록 그녀를 끌어안은 강시후의 팔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내 허리를 부러뜨릴 셈이야?”
임유나는 발끈하며 강시후를 살짝 꼬집었고, 연애할 때 투덕거리던 사소한 행동은 결혼 후에도 변치 않았다.
“미안, 유나야.”
이에 강시후는 재빨리 팔을 풀었고, 임유나는 콧방귀를 뀌더니 그의 손을 쳐냈다. 하지만 이상한 촉감에 고개를 서둘러 숙였고 안색이 돌변했다.
“어쩌다 다쳤어?”
오른손 손가락에 선혈이 낭자했고 군데군데 살갗이 찢어져 벌겋게 부어올랐다.
임유나는 강시후를 데리고 구급상자를 찾으러 갔고, 보통 호텔 캐비닛에 상시 비치되어 있다.
강시후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까 내 목을 조를 때만 하더라도 멀쩡하더니...”
약을 발라주던 임유나의 손이 멈칫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리 몰카를 찍으려고 열연을 펼친다 한들 절대로 그녀에게 손을 대는 남자가 아니었다.
이내 탁자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하자 화면에 정확히 15년 뒤 날짜가 떴다.
“유나야, 그동안 대체 어디 있었어?”
15년 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해 123명의 승객이 행방불명됐고, 어느 한 작은 섬에서 블랙박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실종 승객들의 시신은 수년 동안 해변에서 속속 찾아냈다.
강시후는 임유나를 찾고 싶었지만 한 편으로는 찾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살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꿈속에서 수없이 갈망했던 장면이다.
강시후의 질문 따위 들리지 않는 임유나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15년? 그럴 리가... 그렇다면 강도하는 21살이 되었겠네? 강로이와 강이안도...”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 집요한 눈빛으로 말했다.
“도하한테 영통해 봐.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 시후야, 얼른 연락해.”
만약 사실이라면 15년이라는 세월의 공백을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적어도 어른이 된 강도하의 모습을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껏 격앙된 임유나를 보자 강시후는 서둘러 달래주었다.
“알았어. 유나야, 바로 전화걸게.”
강도하와 영상통화를 시도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받지 않았고, 결국 세 번이나 반복해서야 겨우 연결되었다.
“무슨 일이죠?”
싸늘한 한 마디와 시커먼 화면이 임유나의 초조한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사람이 절대로 귀염둥이 아들일 수 없다. 매일같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엄마 아빠만 찾아다니던 녀석이 설령 성인이 된다고 해도 청량미가 넘치는 청년으로 자랐을 텐데 이렇게 음침한 분위기를 풍길 리 있겠는가?
“도하야? 강도하 맞아?”
임유나는 휴대폰을 빼앗아 자신을 비추었다.
화면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이며 영상이 나타났다.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임유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부모로서 자식의 이목구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누가 봐도 강도하의 어른 버전이며, 어릴 때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빠가 개나 소나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나?”
그리고 통화가 뚝 하고 끊겼다.
임유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아들에게 야단맞았단 말인가?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한 법이다. 아까만 해도 혼란스럽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이내 휴대폰을 탁자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물컵을 집어 들고 절반 넘게 벌컥벌컥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해 봐.”
귀여움으로 무장한 아이가 어쩌다 고슴도치로 변했지?
강시후는 눈을 내리깔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고, 얼굴에 울적함과 지울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네가 실종된 다음 전 세계를 샅샅이 뒤지느라 아이들을 잘 케어하지 못 했어. 그리고 녀석들도 날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서... 미안해, 유나야.”
임유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아는 만큼 당시 사귀기 전부터 자주 사용했던 동정심 유발 작전을 시전하다니.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15년 동안 실종되었다는 가정하에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강시후도 아내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가정 파탄과 다름없었다.
임유나는 하느님의 끔찍한 장난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괜스레 속상했다.
“아니, 시후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도 모르겠어. 비행기가 추락해서 바다에 빠졌는데 기내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썼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빠져나올 수 없었어. 게다가 바닷물이 입에 가득 차서...”
임유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했고, 심지어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다시 눈을 떠보니 욕조에 누워 있었고, 그리고 네가 나타나서 목을 조르는 바람에 아프다는 기억밖에...”
임유나는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강시후의 품에 안긴 채 두 팔로 목을 감싸 안았다. 이내 그의 목에 이마를 대고 두근거리는 맥박을 느끼며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은 강시후를 의지하는 행동에서 비롯된 애교인지라 뼈에 새겨진 습관이 되어버렸다.
“걱정하지 마. 유나야, 내가 있잖아. 널 반드시 지켜줄게.”
강시후는 임유나를 달래주며 몰래 침대 머리맡의 향초에 불을 붙였다.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흐릿해졌다.
“어떻게 눈을 다시 떴더니 15년이나 지났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도하도 쌀쌀맞게 변했고, 그동안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리고 강로이와 강이안도 어린 나이에...”
아로마 향기를 맡으며 임유나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고, 목소리도 어눌해지면서 서서히 잠이 들었다.
품에 안긴 여자가 꿈나라에 가자 강시후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선생 불러줘.”
통화를 마치고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화면에 호텔 복도 CCTV 영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방을 나선 시점부터 재생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피범벅이 된 오른손은 임유나의 손목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한편, 강도하의 방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영상통화에서 보여준 무심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고, 어머니와 닮은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나니 헛구역질이 날 뻔했다. 아버지는 이제 제정신이 아닌가? 어떻게 대타를 찾을 생각하지?
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분풀이 겸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강도하와 친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평소에 설령 농담하더라도 어머니를 건드리는 건 금기사항이며, 행여나 의도치 않게 실수로 잠깐 언급해도 얄짤 없었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마치 성난 사자 같았다.
천장에서 흔들거리던 샹들리에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고, 방 안은 금세 어둠에 휩싸였다.
소파에 주저앉은 강도하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손에는 6살 때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줬던 핸드메이드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이내 목걸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고, 현재로서 그가 유일하게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고, 고요함 속에서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무기력하고 불안하게 느껴졌다.
‘엄마, 보고 싶어요.’
잠시 후 강도하는 눈을 번쩍 떴다.
‘고작 가짜가 엄마 흉내를 내게 할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