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녀의 착각
누군가를 마음에서 덜어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가인은 고현우를 자그마치 10년이나 짝사랑했다. 그 10년간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인 건 술에 취한 어느 날 고현우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호텔에 가자고 한 뒤부터였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뜨거운 밤을 보냈다. 술기운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술을 제정신이 아닐 때까지 마셨으면 관계를 맺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고현우가 이가인을 호텔로 데리고 간 건 그녀에게 작은 호감이라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잠자리한 다음 날 예상대로 고현우는 술 때문에 한 실수였으니 잊자는 등의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우리 한번 만나볼까?”
이가인은 이미 오랜 시간 그를 짝사랑해왔기에 그의 제안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하지만 고현우는 얘기를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닌 조건을 한 가지 덧붙였다.
“나 부교수 단지 얼마 안 됐고 너도 지금 수간호사 준비하고 있으니까 우리 만나는 건 당분간 비밀로 하자. 그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을 것 같아. 어때?”
두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혜임 병원은 오진시에서 제일 유명한 사립 병원으로 의사도 간호사도 전부 명문대 출신인 경쟁이 매우 치열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한가득 모인 가운데서도 유독 더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고현우였다. 그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학사와 석사, 그리고 박사 과정을 한꺼번에 수료할 수 있는 통합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남들보다 훨씬 더 빨리 직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밤낮없이 6년을 버티며 이제는 부교수 자리까지 올라갔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공개 연애를 하게 되면 고현우는 높을 확률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고 수간호사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에게도 영향이 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가인은 아주 흔쾌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좋아.”
두 사람은 연애하기로 한 뒤로도 전과 마찬가지로 그렇다 할 교류를 전혀 하지 않았고 만나더라도 그저 가볍게 인사만 주고받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연애한다고 추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주 완벽한 비밀 연애였다.
고현우는 30대도 안 돼 벌써 연봉이 억 소리가 넘어가는 아주 전도유망한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얼굴까지 준수해 직장 동료는 물론이고 환자들까지 하루가 멀다고 그에게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고현우는 그런 유혹에도 언제나 흔들림 없이 한결같이 공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서 그런 남자가 같은 병원의 간호사와 몰래 연애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성을 가까이 두지 않는 면에서는 이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크게 없었기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현재는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며 아래로는 아직 학생인 남동생까지 있다는 자신의 가족사와 지방러 출신이라는 집안 배경을 대놓고 작업 거는 남자들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남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를 향한 관심을 접기 시작했다. 다들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현우는 그런 그녀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에게 만나보자는 제안을 했다.
고현우는 그녀의 첫 남자였고 그는 그녀가 남자에게 가지고 있는 환상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었다. 그래서 이가인은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좋았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인지하고 있었다. 고현우는 개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집안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그와의 연애가 무조건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욕심이 났다. ‘어쩌면 나와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가인은 고작 3개월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고현우와 사귄 지 거의 100일이 다 되어 갈 때 즈음 이가인은 그와 100일을 함께 보낼 생각에 며칠 전부터 마음이 잔뜩 들떠있었다. 하지만 타이밍도 참 얄궂게 마침 출장 일정이 잡혀버려 고현우는 부득이하게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 있는 3일 동안 그는 이가인의 전화를 단 한 통도 받지 않았다. 그저 문자로 [회의 중]이라는 짤막한 세글자를 보낸 게 다였다.
의사들은 원래 식사를 챙길 겨를도 없이 바쁘기에 이가인도 어쩔 수 없다며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역시 100일 당일은 그와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녀는 고현우의 체취라도 느끼려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초인종이 아닌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아무도 없어야 할 집안에서 웬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굴 집에 끌어들인 거야?!”
여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여자는 조금 더 목청을 높였다.
“어떤 여자를 집에 들인 거냐고! 내가 묻잖아!”
이가인은 시선을 내려 현관에 있는 두 켤레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그중 한 켤레는 고현우의 것이었고 그 옆에 있는 한 켤레는 누가 봐도 여자의 것이었다.
이가인은 계속되는 침묵에 속으로 아주 잠시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전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 안쪽에서 고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그 칼 안 내려놔?!”
여자가 울며 외쳤다.
“너 혹시 다른 여자 생겼어? 그 여자 좋아해?”
“그거 내려놓고 말해!”
“네가 먼저 말해! 그 여자가 누군지!”
여자의 외침에 고현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주었다.
“섹파야. 그저 몇 번 잔 게 다야. 그러니까 빨리 칼 내려놔!”
이가인의 마음을 찌른 건 이 말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그녀를 아프게 한 건 여자가 다칠까 봐 진심으로 걱정하는 고현우의 다급한 말투였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너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너고.”
“그건 그냥 화나서 홧김에 한 말이잖아! 내 마음 좀 달래 달라는 말인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럼 묻겠는데 너, 그 남자랑 무슨 사이야?”
고현우의 질문에 여자가 소파를 퍽퍽 내리치며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건데? 내가 죽어야 내 말 믿어줄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고현우가 여자를 말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강수진!”
강수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물었다.
“네가 집으로 끌어들인 그 여자, 이름 뭐야? 몇 번이나 잤어? 그 여자 사랑해? 나보다 예뻐?”
고현우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답했다.
“아니. 안 사랑해. 그저 홧김에 몇 번 잔 것뿐이야. 너 보라고 잠시 함께 한 것뿐이라고. 이제 만족해?”
“나쁜 새끼...”
강수진의 목소리가 한껏 누그러졌다.
이가인은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연인의 재결합 대화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안으로 쳐들어가 고현우에게 따지거나 강수진의 머리끄덩이를 잡지 않은 건 자존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제를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세상을 살다 보면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기에 굳이 에너지를 뺏겨가며 그 혼란 속에 발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
이가인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넋을 놓고 있자 남자도 움직임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생각해?”
이가인은 시선을 돌려 자신과 몸을 겹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만난 지 40분밖에 안 된 남자와 침대 사정 외의 대화는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룻밤 상대를 찾은 것에는 ‘홧김에 고현우에게 복수하고 싶어서’라는 감정도 물론 있었지만 더 많게는 고현우라는 쓰레기를 잊기 위한 다른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차례의 정사가 끝난 후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먼저 씻을래?”
그러자 이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먼저 씻어.”
남자는 그 말에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기분 좋게 씻고 나와 보니 방금까지만 해도 몸을 섞었던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깔끔하게 정돈된 이불만이 그를 반겼다.
...
다음날.
이틀의 휴가를 마친 이가인은 아침 일찍 입원 병동으로 출근해 동료 간호에게서 인계를 받았다.
“그저께 밤에 VIP 1호 병실과 VIP 2호 병실에 새 환자가 들어왔어요. 교통사고였고 다른 과에서 모든 치료를 마친 다음 우리 과로 온 환자들이에요. 이따 9시에 한 분은 척추, 그리고 한 분은 경추 수술이 잡혀있어요.”
이가인이 차트를 보며 물었다.
“집도 선생님은 각각 누구예요?”
“VIP 2호 병실의 경추 수술은 고현우 교수님이 집도하기로 했고 VIP 1호 병실 환자의 집도의는 아직 몰라요.”
동료 간호사의 말에 이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직 모른다뇨?”
그러자 동료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말했다.
“이건 나도 다른 쌤들한테서 들은 건데 VIP 1호 병실 환자가 우리 병원의 의사가 아닌 외부 의사를 지목해서 수술을 받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지금 그 선생님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이가인은 그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혜임으로 왔다는 건 이곳 의료진들의 실력이 어떤지 다 알고 있다는 소리일 텐데 그런데도 굳이 외부 의사를 지목했다고?’
그때 동료가 이가인의 생각을 눈치챈 듯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그러는데 1호 병실 환자가 그 유명한 권씨 가문 사람들과 친분이 있대요.”
“아...”
이가인은 그 말에 바로 납득했다.
혜임 병원은 권씨 가문 소유의 병원이라 그 가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면 집도의 정도는 원하는 사람을 아무나 지목할 수 있었다. 병원 내부든 외부든 상관없이 말이다.
“교수님, 좋은 아침입니다.”
동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가인의 뒤편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말에 이가인이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고현우의 모습이 보였다.
6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여전히 특유의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가인도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아주 공적인 인사였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고현우는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고는 바로 다시 갈 길을 갔다.
그때 뒤늦게 온 젊은 간호사가 고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고현우 교수님은 조건도 좋으시면서 왜 여자친구를 안 사귀시는 걸까요?”
그러자 이가인의 동료 간호사가 대답했다.
“조건이 너무 좋아서 누굴 보든 성에 안 차나 보죠.”
“아쉽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이 드라마였으면 백 퍼센트 나랑 사귀었을 텐데.”
“왜요?”
“그야 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한낱 간호사니까요. 드라마에서 보면 고현우 교수님 같은 캐릭터는 항상 저 같은 캐릭터랑 몰래 연애하잖아요.”
이가인은 바로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린 간호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오후 2시 반.
정형외과 과장과 간호과장이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30분도 안 되는 짧은 회의라면서 정교수와 부교수 그리고 휴식 중인 의사들까지 모조리 다 불러모았다.
정형외과 과장인 장대호가 활짝 웃으며 바로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죠. 이쪽은 정승진 교수라고 근 6년간 줄곧 플링턴과 베르헨에 있다가 이제 막 귀국한 천재 의사예요. 아, 14살 때 오진 대학교에 진학했으니 여러분들과는 선후배 사이가 되겠네요. 정 교수가 아직 나이는 어리나 십 년이 넘는 수술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니 다들 앞으로 잘 배우도록 하세요. 참, 오늘 오전에 있었던 VIP 1호 병실 환자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도 바로 정승진 교수였습니다.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수술이었는데 4시간도 안 돼 끝을 냈죠.”
장대호의 마치 아들 자랑을 하는 듯한 말에 의사들은 하나둘 눈을 반짝이며 정승진에게 아부 섞인 말을 건넸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승진은 그들의 칭찬에 옅게 웃었다.
간호사들은 뉴페이스의 등장에 잔뜩 흥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재라 불리는 고현우보다 더 경력이 화려하기도 했고 얼굴도 고현우보다 더 준수했으니까.
천재의 정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회의실 내부는 정승진 덕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유독 마음 놓고 웃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가인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정승진을 알아봤다. 그가 바로 어제 자신과 잠자리를 했던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 말이다.
이가인은 제발 정승진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길 바라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어제는 화장도 평소보다 진하게 했으니까 못 알아볼 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런데 그때 정승진이 정확히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 여기서 다 뵙네요?”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이가인에게로 쏠렸다.
이에 이가인은 속으로 한숨을 한번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