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허유미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권미연이 나를 찾으러 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삼촌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상, 강재욱은 내가 학교로 왔을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강재욱이 직접 학교에 와서 소란을 피우진 않겠지만, 대신 쓸수 있는 방법은 많을 거라고, 나 역시 짐작하고 있었지만 권미연이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다.
기숙사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권미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너무해! 너무해! 우리는 죄 없는 가장을 감옥에 보내고 고아와 과부처럼 살게 됐는데, 조카라는 녀석이 왜 허위신고까지 했는지 묻고 싶을 뿐인데, 왜 나를 막아?”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했다.
“삼촌이 그렇게 잘해줬는데, 삼촌을 배신하고 경찰에 넘겼다니까! 집이 망하고 부모가 죽어도 우리는 천금처럼 떠받들었는데, 돈 많은 남자한테 붙더니 돌아서서 삼촌을 감옥에 집어 넣다니!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주변에는 아침을 먹으러 가거나 아침 수업을 하러 가려던 여학생들이 많았는데, 일부는 걸음을 멈추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래? 집안은 망했는데 부자 남자 친구를 사귄다고?”
“삼촌을 경찰에 넘겼다니, 좀 심한 거 아니야?”
기숙사 사감이 단호하게 말했다.
“기숙사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조카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세요.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고요.”
권미연은 계속 무언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들자마자 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더니, 두 걸음 앞으로 다가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서아린, 이 배은망덕한 년! 지금 당장 나랑 같이 가! 경찰서에 가서 허위신고라고 자백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그럴 이유 없는데요.”
“다들 들었죠? 삼촌을 경찰에 넘겼다는 걸 인정했어요! 우리가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이런 배신을 한다니! 이런 못된 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몇몇은 그녀를 두둔하며 나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린 학생, 그렇게 살면 안 돼.”
그중 한 명은 권미연을 부축하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도난 사건 때문에 신고한 겁니다. 누군가 내가 묵은 호텔 방 카드키를 들고 침입했어요. 그래서 신고했는데, 왜 잡힌 사람이 삼촌이었을까요?”
권미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남자가 분명히 삼촌이 카드키를 줬다고 경찰 앞에서 자백했어요. 그리고 내 옷을 벗기고 몰카를 촬영해 해성대 커뮤니티에 유포하려 했다고도 자백하던데요? 그렇게 하면 저는 더는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고, 삼촌네는 저를 ‘돈 많은 사람’에게 적당한 가격에 넘길 수 있었겠죠.”
권미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돼! 네 삼촌을 모함하려고 별소리를 다 만들어내는구나! 넌 정말 못됐어! 네 부모도 돈이 생기니까 가족을 버리더니, 너도 똑같아! 네 부모를 보고 컸으니 아주 하는 행동까지 똑 닮았어! 그러니까 그 집구석이 망한 거야!”
그녀가 내 부모를 모욕하는 순간, 내 안의 분노가 폭발했다.
내 부모님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잘해줬다.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100평대 아파트도 내 부모님이 10년 전에 사준 것이었다.
전생에서 나는 그들이 내 부모님을 헐뜯는 말을 들었다. 집 사라고 겨우 6억 원만 지원하고 우리는 대저택에서 산다며 쪼잔한 사람들이라 욕했다. 그러면서 망하는 건 자초한 일이고 나 또한 남자에게 몸이나 팔며 살아갈 운명이라는 심한 말까지 했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했다.
“작은엄마, 알다시피 나는 앞을 볼 수 없다 보니 항상 녹음하는 습관이 있어요. 이 녹음 들어볼래요?”
내가 핸드폰을 꺼내자, 권미연은 당황한 나머지 재빨리 내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뭐 하는 거야! 너 지금 뭐 하려고!”
그녀의 다급한 행동을 본 사람들은 모두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까 그녀를 부축하던 학생도 얼굴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쳤다.
“세상에, 이런 친척이 다 있냐. 집이 망해서 어려워진 조카를 돕진 못할망정 더 나쁜 길로 몰아넣으려고?”
“서아린 맞지? 문과대학 퀸카? 쟤는 어쩌다 저런 친척을... 진짜 최악이다. 어떻게 조카한테 저럴 수가 있어?”
권미연은 내 휴대전화를 빼앗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직접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주위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그녀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물러서지 않는 걸 보니, 강재욱이 그녀에게 뭔가 큰 보상을 약속했겠지.’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작은엄마, 따님도 해성대학교에 다니죠?”
권미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아린, 너... 넌 그렇게까지 하면 안 돼...”
그녀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딸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듯했다.
두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 사랑하는 딸의 이름은 서지안이고, 서지안은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심이 센 아이였다.
서지안은 권미연의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다시 나를 찾으러 온다면... 나도 당신 딸 이름을 모두에게 알려버릴지도 몰라요.”
권미연은 이를 악물며 나에게 핸드폰을 던지듯 돌려주고는 씩씩거리며 떠나버렸다.
나는 권미연이 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닥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야 했다.
이때 허유미가 황급히 몸을 낮춰 내 핸드폰을 주워 들고 나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린아, 네 핸드폰이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들어 올려 핸드폰을 쥐여주었고 나는 핸드폰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 안에 권미연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돈에 눈이 먼 사람이지만, 서지안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서지안을 부유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고, 그 아이에게 오점이 남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간단히 씻고 나왔다. 그러자 룸메이트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나를 몰래 훔쳐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내 책상 위에 우유 한 팩을 올려놓았다.
“방금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먹을 게 없을 거잖아. 이거 마셔. 뜨거운 물에 데워놔서 아직 따뜻해.”
우유를 건넨 건 어제 나를 보고 ‘운이 좋다’고 말했던 그 여자애였다.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의 미안함과 동정심을 내비쳤다.
“고마워.”
나는 우유를 받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고, 당황한 듯 손에 들고 있던 빵까지 내 손에 쥐여주고는 옆에 있던 친구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나도 빵과 우유를 가방에 넣은 후 흰 지팡이를 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얼마나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지 새삼 실감했다.
나에게 다시 시력을 돌려주었고, 무엇보다도 죽기 전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었으니, 신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한 나는 흰 지팡이를 접어 넣고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며 ‘시카 테니스 클럽’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젯밤에 채용 공고를 봤는데, 혹시 아직 직원 모집 중인가요?”
“어서 와요! 아직 모집 중입니다. 혹시 테니스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희 클럽에서는 직원도 테니스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고... 물론 직접 플레이할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프런트 직원이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NTRP 3.0 정도 됩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3.0이요? 그 정도면 연습 센터에서 코치도 할 수 있는 수준인데, 정말 여기서 직원으로 일하시려는 건가요?”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프런트 직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 짐작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인사팀 담당자를 만나보시죠.”
나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곳 ‘시카 테니스 클럽’은 해성시에서 상류사회와 연이 닿을 수 있는 특별한 테니스 클럽이었다. 이곳은 100% 회원제였으며, 연간 회원비만 1억 원 이상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돈이 있다고 해서 가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재산 증명이 필요했고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강재욱의 삼촌, 강도현은 많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테니스만큼은 열정적으로 즐겼고, 그는 이 클럽의 VVIP 회원이었다.
전생에서 송지우가 강재욱에게 그의 삼촌 취향을 은근히 캐물을 때, 나는 그 대화를 우연히 들었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주 강재욱을 통해 강도현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 했고, 그럴수록 나는 그녀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강도현은 올해 26세로 강씨 가문의 실질적 후계자이며, 강재욱의 친삼촌이자 송지우가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던, 하지만 끝내 가질 수 없었던 그 남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도현이 나의 복수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