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송지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실수했다는 듯 입을 살짝 가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은근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강재욱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괜찮다는 듯 웃었다.
“괜찮아. 자책할 필요 없어.”
송지우는 손을 빼려 했지만, 곧 그의 말에 따라 행동을 바꿨다.
“재욱아, 여기서 아린이랑 있어 줘. 아린이에게 이렇게 쉽게 사람들이 말을 거는 거 보면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 잘 돌봐 줘. 나는 가서 스키 강습을 좀 받아야겠어.”
강재욱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스키 강습? 당연히 내가 해줘야지. 내가 스키를 얼마나 잘 타는지 알잖아.”
“아린이는 어떡해?”
송지우가 나를 바라보았다.
강재욱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근처에 있던 중년 남자 강사를 불러 세우고 몇 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곧 나를 떠넘겼다.
“이 친구는 앞이 안 보입니다. 잘 챙겨 줘요. 찝쩍대기라도 했다가는 당장 리조트에서 잘리게 될 줄 알아요.”
그렇게 협박 같은 당부를 남긴 후, 강재욱은 송지우를 데리고 스키를 타러 갔다.
송지우가 있는 한, 강재욱은 주변의 다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한편, 그 덕에 나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스키 강사는 내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강재욱은 이곳의 단골이자 VIP 고객이었기에 강사는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사님, 휴대폰을 잠깐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강씨 가문 도련님께서 절대 빌려 드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휴대폰을 주지 않는 것도,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차단하는 것도 강재욱이 나를 가둬두는 방식이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휴대폰도, 현금도 없이 외진 스키장에서 갇혀 있는 건, 사실상 쇠사슬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이미 시력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이 회복이 일시적인 것은 아닌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강사가 한눈을 파는 틈을 타 흰 지팡이를 들고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아까부터 이곳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봤더니 주차장은 호텔 뒤편에 있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해 강사에게 붙잡혔다.
“고객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길을 잃었어요.”
“고객님은 시각 장애인이시잖아요. 제발 가만히 계세요. 도련님께서 꼭 잘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고객님이 없어지면 제 일자리도 사라질 겁니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혼자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스키장은 차가 없으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고, 나에게는 운전면허도 차도 없었다.
스키 강사가 성실하게 가르친 데다가 이미 시력이 돌아온 나는 금방 익힐 수 있었다. 몇 번 연습한 후, 나는 혼자서 스키를 타고 십여 미터를 왕복했다.
“아린이 진짜 대단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렇게 잘 타다니! 재욱아, 그에 비해 난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송지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강재욱이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야. 원래 어려운 거야. 서아린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송지우는 귀엽게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
“뭐야... 인정할 건 해야지. 아린이가 잘하는 건 팩트잖아. 그리고 난 너무 힘들어. 이제 안 탈래.”
“그래? 그럼 데려다줄게.”
강재욱은 송지우를 호텔로 데려갔다.
나는 강사와 함께 다시 두 바퀴 정도 스키를 타며 연습했다.
그러던 중, 다시 돌아온 강재욱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강재욱은 강사를 힐끗 바라본 뒤 내게 시선을 돌렸다.
“보이지도 않는데, 스키는 무슨.”
“재욱 오빠, 앞을 볼 수 없는 날 스키장까지 데려오고 강사까지 붙여 놓고 스키를 탔다고 뭐라고 하는 거야?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내 질문에 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강재욱이 왜 눈이 먼 나를 여기 데려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스키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는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스릴 넘치는 취미였지만, 시각 장애가 있는 나에게는 그저 공허한 절망을 안겨주는 일일 뿐이었다.
3년 전 오늘, 남들은 웃으며 즐기는 가운데, 나만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 또한 강재욱이 송지우에게 바치는 또 하나의 서프라이즈였었다.
그는 속으로 송지우에게 네가 죽도록 원망하는 서아린이 앞도 보지 못하는 꼴로 얼마나 비참한지 좀 봐보라고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내 처지가 충분히 비참하지 않아서인지, 그는 아직 송지우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왜 이렇게 말이 많아?”
그는 내 손목을 잡으며 돌아섰다. 스키복을 벗지도 못한 채 강제로 끌려가던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눈밭에 내팽개쳐졌다. 차가운 눈이 옷깃과 소매로 파고들어 오자, 몸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강재욱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한 번 넘어졌다고 뼈라도 부서진 것처럼 구네. 어디서 배운 거야? 연기도 참 어설프다.”
그는 내 몸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는 다시 거칠게 잡아당기며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지우가 우리를 보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재욱아, 아린이 많이 추워 보이는데, 방에 데려가서 좀 쉬게 해. 나도 방에 들어가서 좀 쉴게.”
“그래.”
강재욱은 웬일인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송지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그들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전생의 나는 스키장에 오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서서, 주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그때 강재욱은 나를 방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송지우와 신나게 스키를 타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때의 나는 강재욱이 나를 챙겨 줄 거라고 기대한 적이 많았지만 번번이 무너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생에서는 그가 멀어지길 바랐더니 오히려 나를 방까지 데려다줬다.
방으로 돌아오자, 젖은 옷이 살갗에 들러붙어 오한이 더 심해졌다.
몸을 떠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강재욱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 얼굴에 붙어 있던 젖은 머리카락을 살며시 치워 주면서 손가락으로 내 볼을 꽉 꼬집었다.
“방금 아래에서 했던 말은 다시 주워 담아야겠는데? 서아린, 보기보다 몸이 약하네.”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거칠게 밀어냈고 짜증이 노골적으로 묻어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반항까지 하네?”
그는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추우면 이불 속에서 좀 녹여. 난 샤워하고 올게.”
너무 추웠던 나는 침대로 다가가 스키복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방 안에는 따뜻한 난방이 들어와 있어 시간이 지나자 얼어붙었던 손과 발이 서서히 녹았다.
샤워를 마친 강재욱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욕실에서 나와 침대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나를 이불속에서 들어올렸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는 키득거리며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나를 세면대 위에 앉혔다.
“뭘 하긴, 씻겨 주려는 거지.”
나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는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었다.
강재욱이 역겨운 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송지우를 향한 사랑을 떠들어대면서도 꼭 필요할 때는 나에게 그 더러운 손을 뻗었다.
‘역겨워!’
“싫어!”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거부할 권리가 있을까? 이렇게 마른 데다 힘도 없고, 게다가 앞도 못 보는 네가?”
그는 내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하든 넌 속수무책이잖아.”
‘속수무책?’
그 단어가 내 머릿속을 울려 퍼졌고, 이내 마음속에서 억눌렀던 분노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나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가. 내가 알아서 씻을 테니까.”
그는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말했다.
“그럴래? 알았어.”
하지만 나는 그의 미소를 보고 그가 이렇게 쉽게 물러설 리 없다고 직감했다.
그는 욕실 문을 열며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다시 문만 살짝 닫았다.
욕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강재욱은 그동안 나간 척했던 거였어!’
나는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전생에도 강재욱은 이렇게 나를 농락했던 거야. 정말로 욕실에서 나간 적은 없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