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나는 강재욱의 연인으로 3년을 보냈지만 그와의 관계는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빛을 보지 못하는 건 내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3년 전, 나는 시력을 잃었다.
실명한 지 4년째 되는 날,
나는 거칠지만 따뜻했던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욱 오빠... 레오는? 여긴... 여긴 어디야?”
레오는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친구가 선물해 준 안내견이었다.
“타마이.”
“...나도 여기가 타마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것 같아서 좀... 무서워.”
어제 강재욱이 나를 타마이로 데려왔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황량한 벌판을 스치는 바람은 이상한 냄새를 몰고 왔다. 건조하고 뜨겁고 역겨울 정도로 꿉꿉한 냄새...
그때 평소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이 얼음처럼 차가워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려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텅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버려지다니...’
“너희 집이 왜 망했는지 알아? 맞아! 내가 그랬어!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도 없었으면서 왜 지우를 입양했냐고! 왜 지우를 파양했는지 물었어!”
그 순간, 내 눈앞에는 3년 전 아버지가 건물에서 몸을 던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빚쟁이들이 들이닥쳤을 때, 날 감싸안고 연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모습...
손가락 사이로 보이던 어머니의 새하얀 목에 깊게 그어진 칼자국에서 뿜어져 나오던 새빨간 피, 그리고 점점 식어가던 손과 결국 차갑고 굳어버린 손가락 마디마디...
‘리 집이 망한 게... 강재욱 때문이라고?’
나는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우린... 아무도 버리지 않았어. 오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러나 내 부정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내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지우가 너희 집에 입양됐을 때, 넌 갑자기 나타난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래서 겨우 일곱 살이었던 지우를 도로 위로 밀어버려 다치게 했지! 지우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넌 끝까지 네 부모님께 고집을 부려 결국 지우를 파양하게 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강재욱은 그 말을 내뱉는 동시에 나를 거칠게 밀어버렸고, 그 순간부터 사방에서 끊이질 않는 차량 경적이 울려 퍼졌다.
나는 어떤 차가 오는지, 어디에 불빛이 있는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내게 달려드는 듯한, 귓가를 찢을 듯한 소름 끼치는 클랙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우가 겪었던 무력함이 어떤 건지! 너도 한 번 느껴봐!”
그 순간, 다섯 살 때 도로 한가운데로 밀려났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레오야,레오야...”
나는 절망을 느끼며 안내견 레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무언가 다리에 부딪혔다.
발등 위로 느껴진 익숙한, 그러나 차가운 감촉...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자, 손끝에 닿은 굳어버린 몸뚱이와 뻣뻣하고 차가운 털...
그리고 이내 목걸이에 새겨진 [레오]라는 이름을 확인한 순간, 눈물이 주책없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귀를 찢는 듯한 엔진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지나가며 굳어진 레오의 몸을 깔아뭉갰다.
나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차들의 경적은 멈출 줄 몰랐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흐느껴 울었다.
‘살고 싶어... 제발 살려줘...’
그 순간, 저 멀리서 어렴풋한 빛이 보였다.
나는 무작정 그 빛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쾅!’하고 가드레일에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음이 울리면서 나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튕겨 오르며 추락하는 느낌과 함께, 모든 것이 한순간에 검게 가라앉았다...
“아린아!”
그 순간, 멀리서 울려 퍼진 강재욱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를 찌르는 듯한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더니 클랙슨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 한패였구나.’
내가 어둠 속으로 잠식되기 전에 들었던 마지막 깨우침이었다.
...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성가신 소리에 나는 화들짝 눈을 떴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이 아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움켜쥐었다가, 다시 천천히 펴 보았지만, 손가락 하나하나의 모든 움직임이 또렷하게 보였다.
‘내가... 살아 있다고?’
“안에서 뭐 하는 거야? 다들 너 하나 기다리고 있어.”
강재욱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아 문 쪽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경계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스스로를 지킬만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주변을 더듬었다.
그때, 침대 머리맡에 놓인 호텔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오크밸리 리조트]
나는 참고 있던 숨을 삼켰다.
내가 죽은 날은 한여름, 가장 더운 삼복더위였다.
‘게다가... 그곳은 타마이였어. 그런데 지금 나는 왜 오크밸리 리조트에 있는 거지? 이곳에 온 적은 딱 한 번 있었어. 그것도 3년 전...’
3년 전, 강재욱은 나와 송지우를 데리고 이곳으로 스키를 타러 왔다.
그날, 송지우가 다쳐서 강재욱은 그녀를 안아 들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떠났고 나는 이 호텔에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내 옷을 찢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단순히 병 때문에 휴학했을 뿐인데, 그 일로 인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렇게 가족도, 친구도, 모든 걸 잃게 된 나는 부러진 날개를 가진 새처럼 강재욱이 만든 새장 속에 갇혔다.
그러면서도 그의 연인이라는 이름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는 송지우에게 나를 불쌍한 친구일 뿐이라고 소개했다.
‘불쌍한 친구? 불쌍하지...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이 원수인 줄도 몰랐으니 어리석기까지 했지.’
“삐삑... 삐삑...”
문이 열리는 전자음이 들렸다.
옆에 있던 호텔 직원에게 룸키를 건네주며 들어 온 그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짜증이 서려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자, 그의 미간에 접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전생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그가 내게 얼마나 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선명하게 보였다.
“안에 있었으면 대답이라도 하지?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여 있던 흰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바닥을 두드리며 문을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 강재욱이 거친 동작으로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뒤로 당겼다.
그와 동시에 복도에 서 있던 젊은 여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송지우인가 보네...’
그녀는 크고 또렷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피부, 순진한 표정, 나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입술... 그야말로 온실 속에서 자란 공주님 같았다.
‘이렇게 청순하고 예쁘니 강재욱이 그녀를 애지중지 보물처럼 여기며 소중하게 대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때, 등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 하나 입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려? 아니면 내가 직접 입혀 줘?”
그 말에 송지우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재욱아, 아린이 괴롭히지 마. 설마 평소에도 네가 직접 옷 입혀 주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여자인 친구한테 옷을 입혀 줘?”
순간, 강재욱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지우야. 그냥 아린이가 워낙 느리니까 답답해서 그러는 거야.”
“넌 먼저 내려가 있어. 여기 공기도 탁하고... 이 방에 있다가는 기분만 상할 거야.”
강재욱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다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겉으로 보기엔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그 힘에 밀쳐진 나는 마치 짐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벽에 부딪힐 뻔했다. 귓가에 들리는 건 오직 송지우에게 건네는 다정한 말들이었다.
그렇게 송지우 앞에서 나는 강재욱이 불쌍하게 여겨서 챙겨 주는 여자 사람 친구일 뿐이었다.
‘하지만 3년 동안 송지우는 단 한 번도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정말 송지우가 멍청할 정도로 순진했을까?’
강재욱은 송지우를 설득해 아래로 내려보낸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제야 방금까지 짓고 있던 다정한 미소를 거둬들이고 내 옷을 벗기려 했다.
“진짜 내가 입혀 줘야겠다는 거야?”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붙잡고 손끝에 힘을 주어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혼자서도 갈아입을 수 있어. 이만 나가줘.”
그러나 그는 내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고 침대로 밀어버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처음도 아니잖아. 빨리 입고 나가자.”
나는 거칠게 저항하며 그의 인내심에 서서히 바닥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더니 늑대처럼 달려들며 내 목을 노렸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발칙하게 나를 유혹하려는 거냐고!”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전생에서 앞을 볼 수 없었던 나는 3년 동안 순종적이었고 어둠 속에서 강재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 때문에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눈앞에 있는 강재욱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혐오가 가득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욕망은 가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