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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강재욱은 곧 입술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스치듯 만지고 나서 허리춤의 명품 가죽 벨트를 만지작거렸다. 그 의도가 너무도 뻔해서 나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또렷하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깃든 조롱과 경멸은 마치 이미 나를 어떻게 농락할지 구상이라도 끝낸 듯해 보였다. 사실 이번 생의 강재욱은 지난 생의 강재욱과 사뭇 달랐다. 전생에서도 나를 노리개로 여기며 가지고 놀았지만, 송지우를 위해 항상 선은 지켰었다.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 오빠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게. 다만, 지금은 학교로 돌려보내 줘.” 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아니면 학교에서 새 남자 친구라도 생긴 거야? 네 곁을 맴도는 남자는 누가 됐든 상관없어. 내가 다 죽일 거야. 내 보호 없이는 네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그는 비열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는 재빨리 발신자가 강재욱의 아버지인 것을 확인했다. “아빠...” “이 자식아, 회사에도 안 나가고 어디서 또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냥 친구 만나러 나왔습니다.” “친구? 설마 또 그 눈먼 여자애야? 내가 어제 분명하게 말했지, 선 넘지 말라고! 네 삼촌 귀에 들어가면 넌 회사에서 쫓겨날 줄 알아!” 나는 강재욱의 표정을 관찰하다가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전생에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당시 나는 보지 못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재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도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냥 장난감일 뿐입니다. 통제할 수 있는 선에서 끝낼 겁니다.” “그래야지. 내 말 명심해.” 전화를 끊으며 그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나를 ‘장난감’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나는 언제든 쉽게 버릴 수 있는, 그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장난감이었다. 그때 다시 전화가 걸려 오자, 강재욱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지우야?” “재욱아, 나 퇴원할래. 근데 의사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네...” “발목 삔 거 제대로 치료 안 하면 나중에 절뚝거리면서 걸을 수도 있어.”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했다. 송지우를 다룰 때면 강재욱은 마치 소중한 보석을 손에 쥔 듯 조심스러웠다. “재욱아, 나 겁주지 마. 그냥 삔 거잖아… 괜찮겠지?” “내가 왜 너한테 겁을 줘. 정말이야!” “치, 맨날 나 놀려먹잖아. 근데 나 지금 배고파. 달마루에서 파는 베이글 먹고 싶어.” “알겠어!” 강재욱은 핸들을 돌리려다가 나를 힐끔 보며 뭔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강재욱이라면 당연히 송지우를 위해 뭐든지 할 텐데. 뭘 망설이고 있지?’ “재욱아, 내가 잠깐 나가서 사면 돼. 배달도 안 되니, 직접 다녀와야겠어.” “내가 지금 포장해 갈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송지우가 투덜거렸지만,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고 바로 차를 몰아 달마루로 향했다. ‘그래. 이게 내가 아는 강재욱이지. 송지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남자.’ 강재욱은 병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뒤 나를 차에 내버려둔 채, 차 문을 잠갔다. ‘만약 내가 아직도 앞을 볼 수 없었다면? 만약 날 깜빡 잊어버린다면? 나는 이 차 안에서 죽게 되는 건가?’ 전생에서 강재욱은 나를 차에서 내려준 뒤 송지우의 전화를 받고 바로 그녀에게로 달려갔었다. 그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가 몇 시간 뒤에야 내가 없어진 걸 깨닫고 돌아왔다. 그동안 나는 도로 한구석에서 오들오들 떨며 그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가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모르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끝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슬픈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강재욱의 차 안에는 카메라가 있었다. 나는 시력이 돌아온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여전히 더듬거리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조수석 앞 수납함에서 작은 탈출용 해머를 발견했다. 나는 창문을 향해 세 번 강하게 내리쳤고, 세 번째 타격에서 창문이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차 문을 연 뒤, 빠르게 몸을 낮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송지우 덕분에 강재욱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흰 지팡이를 꺼내 들고 평소처럼 땅을 두드리며 병원을 벗어났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사흘 후, 나는 약속대로 테니스 클럽에 갔다. 도착하니 호현주는 준비된 유니폼을 꺼내주었다.사전에 카톡으로 미리 사이즈를 물어봤기 때문에 새로 맞춘 유니폼은 완벽하게 맞았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손목을 살짝 돌려봤다. 손목 보호대를 단단히 감아둔 덕분에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린 씨,오늘 한 시간 반짜리 스파링 파트너 예약이 있어요. 이 고객은 VVIP 회원이라서 수당도 높을 거예요. 물론 아린 씨가 원하지 않으면 거절해도 돼요. 남자 회원이거든요...” 호현주는 살짝 난처한 듯 헛기침을 했다. “아린 씨 사진을 우리 클럽 앱에 올렸더니 예약이 엄청 치열하더라고요. 이번 VVIP 고객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엔 다른 회원님을 선택해도 돼요. 저는 아린 씨가 클럽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리한테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현주 언니가 미리 받은 예약이라면 그대로 진행할게요.” 호현주는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회원님은 한 시간 후에 도착할 예정이에요. 그동안 휴게실에서 쉬어도 되고 몸을 풀어도 돼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 회원님은 예의 바른 분이시고, 우리 클럽 측에서도 아린 씨의 안전을 철저히 보장할 거니까...” “그 전에 코트에서 몸을 좀 풀어도 될까요?” “당연하죠!” 호현주는 직접 나를 경기장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실내 코트 중에서도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나는 이 VVIP 고객이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라켓을 쥐고 몸을 풀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사람이네!’ 지난 며칠간 강도현의 인맥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나타난 남자는 강도현의 오랜 친구인 엄준호였다. ‘강도현과 관련된 사람을 만날 계획은 없었는데, 이렇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엄준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지만, 그의 시선에는 가벼운 농담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깃든 듯했다. “안녕하세요! 스파링 파트너님이시죠?”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굉장히 도도하시네요. 저는 엄준호라고 해요. ‘엄’씨라서 아주 ‘엄격’하다고들... 푸하하...” 그는 썰렁한 아재 개그로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것 같았다. “저는 서아린입니다. 준호 님, 바로 시작할까요? 바쁘실 텐데 비싼 시간 낭비하면 안 되잖아요.” 나는 라켓을 돌리며 손에 익숙해지도록 조정했다. 강도현을 만나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그처럼 권력 있는 남자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접근하려 했을 것이니, 서두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준호가 예약한 시간은 한 시간 반이었다. 그는 내 실력을 시험하고 싶었겠지만, 너무 길어지면 지루할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 같았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그는 점점 더 몰입했고 실력도 상당했다. 막바지에 이르자, 그의 눈빛은 완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아린 씨, 한 시간 더 연장해도 될까요? 제가 친구를 불러보려고요. 같이 랠리 해요!” 그는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도현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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