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서준의 얼굴에는 예전처럼 증오가 가득 담긴 듯한 표정이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남자였다.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한동안 자존심을 버릴 정도까지 상대를 사랑했던 사람이 갑자기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라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이다. 이는 그저 작은 테스트와도 같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봐봐. 말 못 하겠지?” “너를 안 좋아한다는 거 사실이야.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했던 건 밀당이 아니야. 고서준.” 나는 진지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날 믿어. 다시는 옆에서 괴롭히지 않을게. 이제 다섯 날만 있으면 곧 졸업이야. 졸업하면 더 이상 만날 일도 없을 거야. 세상이 아무리 좁다고 해도 우리가 일부러 만날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고 뒤돌아섰다. “날 좋아하지 않으면 누굴 좋아하는 건데?” 겨우 두 발짝밖에 가지 못했는데 고서준이 갑자기 나의 팔목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그는 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더니 분노에 가득찬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민준을 좋아하는 거야?” 고서준은 갑자기 피식 웃더니 경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오늘 아침 나씨 가문에서 김씨 가문에 프로젝트를 하나 줬다면서.” 고서준은 손을 내려놓고 차갑게 뒤돌아섰다. “너를 포함한 너희 온 가족 모두 재밌는 분인 것 같아. 고씨 가문에 팔지 않고 바로 나씨 가문에 팔아?”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귓가에는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의 귓가에는 온통 프로젝트를 고씨 가문 대신 나씨 가문에 팔았다는 말이 맴돌았다. ‘아빠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수아야. 괜찮아?” 고서준이 떠나고, 정서현이 우산을 들고 나한테 달려왔다. 나는 입만 움찔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늘 어떻게 하면 고서준과 선을 그을 수 있을지, 고씨 가문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간단한 방법이 바로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든지 아빠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랑 고서준을 밀어붙였던 이유는 바로 그가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씨 가문과 친하게 지내면 많은 덕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능력 없을 때 누군가에게 잡혀 사는 것이 싫었다. 고씨 가문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윤씨 가문, 임씨 가문, 그리고 강씨 가문을 비롯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빠의 딸인 이상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서늘한 마음에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정서현은 내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고 얼른 나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 수아야. 남자 하나 때문에 이럴 필요 없어.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이 남잔데. 내가 멋진 남자 10명을 소개해 줄게.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만나봐.” “응.”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야 이성을 되찾고 정서현을 향해 피식 웃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학습지를 보고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좀 추워서 그러는데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싶어.” 비를 맞진 않았지만 온몸이 차가웠다. 정서현은 내 손을 만지더니 냉큼 2층으로 올려보냈다. “손이 엄청나게 차갑네. 얼른 가서 씻고 와. 곧 수능인데 절대 아프면 안 되지.” 정서현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면서 주방에 생강차를 부탁했다. “아줌마. 생강차 좀 부탁드려요. 수아 몸이 너무 차가워서 그래요.” 정서현은 나를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1층으로 내려갔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문을 닫자마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빠는 금전적으로 나를 섭섭하게 한 적이 없지만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나를 사랑하지도, 나한테 관심을 퍼붓지도 않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빼고는 그래도 괜찮은 아빠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새엄마가 온 뒤로 나의 의식주를 상관하지 않거나 학대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나랑 김수연을 놓고 봤을 때, 누구를 더 생각하는 것 없이 동등한 관계였다. 하지만 고씨 가문에서는 나는 그저 마음대로 바꿔치기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눈을 감은 나는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생각난 김에 정서현이 나한테 준 핸드폰을 열어 주소록에서 엄마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몇 번이고 걸어봐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엄마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져 핸드폰을 내려놓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다 보니 슬슬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빠의 계획을 알았으니 방어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이미 만 18세 성인이었기 때문에 호적을 따로 팔 수 있었다. 경성 대학교에 붙으면 김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나한테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나한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수능이었고 절대 망치면 안 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자 정서현이 학습지를 내려놓고 나한테 달려오더니 나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아직도 추워?” 그러면서 나를 소파로 데려갔다. “아줌마가 생강차를 준비했어. 난 네가 반신욕을 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 “고마워.” 정서현이 걱정해 주는 모습에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세상에 그래도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네. 서현이가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데 절대 속상할 만한 일을 만들지 말아야지.’ 생강차를 다 마신 나는 정서현과 함께 학습지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나는 늘 정서현 집에 있었다. 고씨 가문의 일은 관여하고 싶지도, 관여할 수도 없었다. 김정태와 나민준이 어떤 합의를 보았는지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다. 수능 전날, 나는 정서현한테 학습지를 그만 보고 머리도 식힐 겸 나가자고 했다. 정서현은 이 말을 듣자마자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우리 두 사람은 결국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 정서현이 바로 명품 판매장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그녀를 붙잡고 옆에 있는 무난한 가게로 들어갔다. “이 가게 옷도 괜찮은 것 같은데 한번 들어가 볼까?” 김씨 가문을 벗어나려면 일반인들의 소비수준이 어느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비록 빈 껍데기뿐인 김씨 가문이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나는 어릴 적부터 200만 원이하의 옷을 산 적이 없었다. 마지못해 옆 가게로 들어온 정서현은 아까와는 달리 흥미를 잃은 모습이었다. “이 가게 옷들 별로 안 이쁘잖아. M사 원피스를 하나 봐둔 것 있는데 그거 먼저 사고 구경하러 오면 안 돼?”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더니 이지현과 그녀의 껌딱지들이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