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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6장

내 말에 고서준은 잠시간 침묵하더니 이내 내 손을 내려놓고 복잡하고 또 미련이 있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내 정신적 지주였어. 내 유일한 가족이었다고. 그런데 너는 우리 할머니를 죽인 살인범을 감싸줬어.” 나는 이지현이 우리 할머니를 죽이고 멀쩡하게 해외로 도망간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한스럽고 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얘기해줄까? 나는 너만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나. 그래서 아파.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고. 그러니까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제발 날 고통스럽게 만들지 마.” 나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잠시나마 잊어보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는 순간 고통은 점점 더 선명해져 가기만 했다. 나는 할머니 생각만 하면 여전히 가슴이 찢기듯 아프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가슴이 답답하다. 그리고 내가 미치도록 사랑했던 남자는 존재만으로도 내 상처를 헤집어놓으며 나를 아프게 한다. 고서준이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건지, 왜 자꾸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게 뭐가 됐든 과거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고 내 고통이 사라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나에게 고통을 준 남자에게서 도망치는 것뿐이다. “미안해.” 고서준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사과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이미 생긴 상처를 아물게 할 수도 없다. 고서준이 나를 언제까지 따라올지는 모르지만 나는 더 이상 그와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내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다. 고서준이 없는, 아무런 고통도 없는 인생을 말이다.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추고 창문으로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왔다. 정말 현실 같은 꿈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버티려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은연중에 고서준이 뭐라고 하는 것도 같았는데 의식이 몽롱해져 듣지 못했다.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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