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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그렇게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그날 고서준과 불쾌한 마음으로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고서준을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이렇게 빨리,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만날 줄 몰랐다. 고서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나한테 다가오자 나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뒷걸음치기도 전에 그는 나의 손목을 잡더니 벽에 밀쳤다. 고서준은 내 앞에 서서 한 손은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고개 숙여 나를 쳐다보았다. “넌 누굴 만나려고 나랑 지현이를 엮어놓은 거야? 나민준? 아니면 은산시 다른 재벌집 아들?” 고서준한테는 나는 그저 값을 매긴 상품과도 같았다. 비록 고서준 마음속에 내가 목적이 불순한 사람이라고 기억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모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던 나는 피식 웃으면서 일부러 자극시켰다. “넌 내가 누굴 택할 것 같은데?” “김수아!” 고서준은 이를 꽉 깨물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서서히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고, 곧 터치하려고 할때 그를 확 밀어버렸다. “누굴 선택하든 넌 아닐 거야.”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순간, 정서현이 바로 나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수아야, 아무 일 없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더 이상 쇼핑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가자.” “그래.” 정서현은 바로 기사님한테 연락했고, 우리 둘은 그렇게 쇼핑몰을 떠났다. 떠날 때,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나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수능 전날이라 정서현의 부모님이 딸과 함께하고 싶다고 외국에서 왔왔다. 기쁜 마음에 부모님의 품에 와락 안긴 정서현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나는 한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십몇 초를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다가 슬며시 거실을 벗어나려고 했다. 집사님이 나를 부르려고 하길래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하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정서현 부모님께서 정치사업을 하신다지만 예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은산시에서 나름대로 상류 인사로 꼽혔다. 정서현의 부모님이 나한테 잘해주셨지만 오랜만의 가족 모임 자리에 끼어있기에는 불편했다. 나는 정서현한테 김씨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아무 호텔이나 잡아 하룻밤 묵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일찍 침대에 누운 나는 요 며칠 계속 학습지를 풀어서인지 내일 시험에 큰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온통 요 며칠 발생한 일들과 전생에 있었던 아쉬움뿐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내일 시험을 위해 이런 감정들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뒹굴다 이제는 자야겠다 싶어서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긴장감이 가득한 수능시험이 진행되었다. 매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밥도 꼬박 챙겨 먹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향해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수능시험이 끝난 날, 강철민 아저씨가 교문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앞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대표님께서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는 강철민 아저씨를 보고도 냉큼 따라가지 않았다. ‘아빠는 요 며칠 날 찾지도 않고, 전화 한 통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집으로 오라고?’ “아가씨.” 강철민은은 내가 움직이지 않자 또 한 번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차 쪽으로 걸어갔다. 김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 뒤였다. 차에서 내려 거실로 들어가자 이미영이 살갑게 날 맞이했다. “수아야. 드디어 왔구나. 그동안 힘들었지? 아줌마가 삼계탕을 끓여놨는데 얼른 먹어.” 신발을 갈아신고 막 대답하려고 했던 때, 나민준이 핑크색 셔츠를 입고 느끼하게 나를 쳐다보면서 웃는 것이다. “안녕. 김수아 학생.” 고서준한테서 나씨 가문이 김씨 가문에 프로젝트 하나를 줬다고 했을 때부터 나민준을 만날 거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이 정도로 급할 줄 몰랐다. 수능시험이 끝난 날 나민준이 바로 우리집에 나타날 줄 몰랐다. 나민준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빠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2층에서 내려오던 아빠는 내가 나민준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 소리했다. “도련님께서 인사하잖아. 못 들었어?” 그러더니 웃는 모습으로 나민준에게 말했다. “도련님, 신경 쓰지 마세요. 수아가 요즘 수능 때문에 긴장했는지 반응속도가 조금 느려요.” “맞아요.” 과일 접시를 들고 오던 이미영이 말했다. “도련님, 신경 쓰지 마세요. 얼른 과일이나 드세요.” 나는 이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요 며칠 수능 때문에 힘들어서 그저 쉬고 싶었다. “저는 됐어요. 샤워하러 올라가 볼게요.” 나는 2층으로 올라가면서 나민준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눈치껏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배다른 동생 김수연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면서 나를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었다. “행동거지 똑바로 하지 그래.” 나는 김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 문에 기대어 물었다. “내 행동거지가 뭐 어때서? 누구한테 똑바로 하라고 그러는데?” “양심에 손 얹고 생각해 봐!” 김수연은 씩씩거리면서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내려가서 너희 엄마 아빠한테 물어볼까? 그게 누군지?” 내가 고자질할 줄 몰랐는지 김수연은 멈칫하면서 나한테 삿대질했다. “어디 한번 해보든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못 할 줄 알아? 날 건드리지 마.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쿵!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십몇 년이나 살았던 방이지만 왜서인지 귀속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 집에 온 이유는 저금통장과 나한테 소중한 물건들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8월 말이면 경성 대학교에 가서 입학 신고해야 하는데 이전에 그 근처에 정서현 명의로 된 집을 한 채 사고 싶었다. 이러면 나중에 김씨 가문과 싸워도 갈 곳 없어 떠돌이 생활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몇 달 동안 아빠한테서 돈을 떼여낼 수 있을 만큼 떼어내고 싶었다. 나는 차라리 김정태와 같은 아빠가 없었으면 했지만 그가 나를 이 세상에 데려온 이상 나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의 돈을 쓰는 것도 응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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