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퇴근을 앞둔 박성준에게 박현석의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새 며느리가 처음 집에 들어왔는데 저녁을 온 가족이 함께 먹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며느리는 저녁에 수업이 있고 엄마를 만나고 와서도 저녁 먹을 시간이 있는데 그는 밖에서 뭘 하기에 시간이 없냐고 다그쳤다.
박현석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혼인신고 이유를 자세히 들은 후 화가 치밀어 테이블을 여러 번 내리치며 손자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어떻게 남의 집 귀한 딸에게 이럴 수가 있어? 엄마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해? 박성준,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박현석은 수염이 펄럭거릴 정도로 화가 났다. 손자가 억지로 밀어붙여 아직 학생인 아가씨를 임신시킨 것도 모자라 혼전 계약서 따위나 작성하게 만들다니.
“평소에 공익 프로젝트는 그렇게 많이 하면서 고작 병원비 몇억으로 애를 힘들게 해?”
“저도 누군가의 계략에 실수로 약을 먹었고 해독제도 쓸데없었어요. 대리운전하는 여자한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냥 물어봤는데 저한테 2억 줄 수 있냐고 묻잖아요. 그래서...”
말하면서 박성준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았기에 마음에 찔려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게 어떻게 저 혼자만의 잘못이에요? 결국은 할아버지가 너무 몰아붙인 탓이지.”
“허, 내가 나서지 않고 너한테 맡기면 박씨 가문 대가 끊기게 생겼는데 죽어서 조상님 얼굴을 어떻게 봐!”
“그러기엔 목청이 쩌렁쩌렁하신 걸 보니 한참 멀었네요.”
박현석이 두 눈을 부릅뜨며 협박했다.
“네가 결혼식 안 하면 내 수명이 20년 줄어들 거야.”
“요즘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중요한 시기라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시간이 없어? 자기 결혼식도 시간이 없어서 못 해?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냐? 반드시 해. 다음 달 초에 꼭 해. 네 고모한테 준비하라고 시키고 나도 지켜볼 거야.”
박현석의 태도는 강경했다. 손자가 젊은 나이에 일밖에 모르니 인생이 걸린 문제는 그가 나서서 강하게 밀어붙여야 했다.
손자며느리가 될 여자는 그냥 봐도 말쑥한 얼굴에 맑은 두 눈이 착하고 똑똑하고 잘 배운 아가씨 같아 마음에 들었다.
손자의 맞선 상대인 재벌가 아가씨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저만치 누군가와 함께 서 있는 소녀가 보였다.
“아가씨 이름이 뭐였지?”
“안시연이요.”
박현석은 눈치껏 자리를 피하는 안시연의 행동에 무척 흡족하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제야 안시연은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시연아, 이리 와서 앉아. 성준이랑 결혼식 얘기 중인데 따로 원하는 게 있어? 어머니께 언제 시간 내서 식사 한번 하자고 해.”
안시연은 박현석의 말을 믿지 않았다. 조금 전 상대를 때리려는 기세가 아무리 봐도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할아버님, 저희 엄마는 많이 아프셔서 병원을 떠날 수 없어요. 결혼식을 올려도 저는 친구네 세 식구를 빼고 초대할 사람도 없고요.”
“흠...”
박현석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지며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러면 어머니 퇴원하고 결혼식 올리는 건 어때?”
“네, 감사해요. 할아버님, 그리고 대표님.”
“들었어?”
박현석이 박성준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시연이가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잖아. 얼마나 착해. 병원 쪽엔 네가 신경 써.”
박성준의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이런 차별이 어디 있나.
안시연은 그녀를 진짜 가족처럼 대하는 박현석에게 감동했고, 박성준이 말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해명했다.
“할아버님, 대표님께서 이미 엄마를 위해 많은 걸 해주셨어요. 병원 쪽도 다 정리됐고 엄마도 두 분께 고맙다는 인사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박성준은 가만히 앉아 안시연을 관찰했다.
안시연은 괜히 찔려서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고맙다는 말 대신 그저 그녀에게 박성준의 존재를 받아들이라는 말만 했다.
“가족끼리 고맙다는 인사가 왜 필요해.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 성준이가 바빠서 제대로 못 챙겨줄 거야.”
박현석은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듯하고 예의도 바르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착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성준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런 아이를 데려왔을까.’
“네, 할아버님.”
안시연은 입으로 대답하면서도 정말 박성준이 들어줄 거라 생각해 그에게 달려가 필요한 걸 말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시연아, 학교 수업 많아? 피곤하지는 않고?”
안시연은 서둘러 대답하지 않고 박현석이 이렇게 묻는 진짜 의도를 추측했다.
정말 그녀의 상황을 묻는 게 아니라 아이를 위해 학업을 중단시킬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아이가 태어나도 수업해야 하고 기껏해야 며칠 쉬며 몸조리할 뿐이었다.
“수업은 힘들지 않아요. 대표님께서 전문가를 고용해서 아이도 건강하게 자랄 거예요.”
박현석은 그녀의 대답에 별다른 감정변화가 없이 여전히 허허 웃기만 했다.
“다 모였으니 식사하지. 백진.”
안시연은 두 사람을 따라 자리로 가서 박성준과 박현석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세 사람 옆에는 각자 시중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도우미가 손을 씻을 따뜻한 물을 가져오고 다른 도우미는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최미숙이 옆에서 공용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사모님, 처음 모시게 됐는데 못 먹는 음식 있으세요?”
“없어요.”
예전에는 어른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자라서 먹고 싶은 것만 먹고 그녀가 싫어하는 음식은 다음날 식탁에 올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고 특히 최근 반년 동안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며 그녀는 더 이상 편식할 용기도 없었다.
그저 배만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먹었다.
최미숙도 긴장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으니 더욱 난감했다.
그저 조심히 음식을 가져와 사모님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호불호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수선정을 정리하라는 도련님의 지시와 아침 일찍 산모 도우미 전문가팀을 데려온 것만 봐도 사모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출생과 출신에 상관없이 뒤에 박현석이 있으니 박성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자식 덕에 귀한 대접을 받는 거다.
식탁에서 세 사람은 대화 없이 각자 밥을 먹었다.
안시연도 편식하지 않고 최미숙이 가져다주는 건 다 잘 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 그녀는 박현석과 박성준이 아직 먹는 것을 보고는 괜히 어색하게 앉아있지 않으려고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집에 있을 땐 전희진과 식사를 마치면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놀러 가곤 했다.
아이들은 수저와 주방에 일절 손대지 못하게 하고 전희진 부친인 전도현이 모든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박현석이 수저를 내려놓자 도우미가 손수건을 내밀었고, 그는 입가를 닦은 뒤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미 배가 부른 안시연도 서둘러 수저를 내려놓았다.
“사모님, 국물 드시겠어요?”
“아니요. 배불러요.”
박현석이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많이 먹어. 할아버지는 나이가 있어서 많이 못 먹으니까 넌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어.”
안시연은 진지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저 진짜 배불러요.”
박현석은 그 말에 아직 먹고 있는 박성준을 툭툭 건드렸다.
“아직도 다 못 먹었어? 시연이 수업하러 가잖아. 네가 데려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