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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뭐 하시는 거예요?” 운전기사의 화난 목소리에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강주호를 바라보았다. “기사님, 내릴게요.” 강주호는 손을 저으며 통 크게 5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주고 기사님을 돌려보냈다. “왜 이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게임은 끝났어.” “은아야, 난...” 강주호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장난치는 게 아니었는데... 단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과연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맞는지 싶어 그의 표정을 곰곰이 살폈다. “진짜야.” 강주호는 내가 아직도 화가 난 줄 알고 진지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가지 마. 내일 나랑 쇼핑 안 할래? 사죄의 의미로 선물 사줄게. 지난번에 찜해둔 가방이 있었잖아.” 그때 백화점에서 20만 원 짜리 가방을 탐냈던 건 사실이었다. 비록 마음에 들었지만 강주호에게 보탬이 되려는 생각에 포기하고 구경만 했다. 그러나 사고 싶다고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사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진작에 눈치챘다. 단지 항상 대접받는 입장이라 정작 베풀 줄 몰랐다. 어쩌면 그가 진심으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진짜 용서해주길 바라는 거야?” 나는 강주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화가 풀린 줄 알고 그는 미소를 활짝 지었다. “당연하지. 우리 그동안 행복했잖아. 고작 이런 일로 헤어지는 건 납득이 안 가.” 고작이라니? 무려 몇 년 동안이나 농락하고 입만 싹 닦으면 그만인가? “그래. 용서할 수는 있지만...” 이내 팔짱을 끼고 강주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랑 사귀면서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자체를 못 받아들이겠어. 그러니까 허가람과 손절한다면 없던 일로 해줄게.” “그건 안돼.” 강주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내가 피식 웃자 그제야 아차 싶은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람이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오해?”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직접 보고 듣고 했는데 오해가 웬 말?” 그리고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캐리어를 빼앗아 들고 다른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강주호가 또다시 막아서자 차 문을 닫지 못하게 꼭 붙잡고 두 눈을 부라리며 경고했다. “장난은 여기까지야.” “서은아!” 미련 없이 떠나는 나를 향해 그는 으름장을 놓았다. “이제 정체도 알게 되었으니 판단 잘해. 오늘 밤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앞으로 호의호식하게 해줄게. 더는 알바하러 뛰어다닐 필요도 없고 재벌 라이프도 즐길 수 있는 거지. 너한테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닐걸?”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뻔뻔스럽게 말하는 강주호를 보자 나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거 놔! 한 번만 더 방해했다가는 성추행으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는 깜짝 놀랐다. “강씨 가문 도련님이 여자를 성추행했다는 내용으로 내일 기사 헤드 라인을 장식하기 싫으면 당장 꺼져.” 나는 단호한 말투로 못을 박았고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살벌한 눈빛에 겁을 먹었는지 강주호는 손을 스르륵 놓아주었고, 이 틈을 타서 주저하지 않고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가시죠.” 택시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더니 점점 속도를 올렸다. 백미러를 통해 뒤쫓아오는 강주호의 모습이 보였지만 곧 걸음을 멈추고 제 자리에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니 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강주호를 진심으로 사랑한 만큼 결국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단칼에 잘라내지 않으면 진흙탕 싸움에 연루될 게 뻔했다. 물론 신분과 집안 차이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생각이 다르면 언젠간 장벽이 생기기 마련이다. 머릿속으로는 이해하지만 기분이 이루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불쾌했다. 택시는 금세 다른 동네로 진입했다. 그동안 강주호를 위해 이엘시 곳곳을 누비며 알바했기에 딱히 낯설지 않았고 대부분 도로는 눈에 익은 편이다. 그러다 등대를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기사님, 여기서 내릴게요.” 이엘시는 가운데 흐르는 강을 기준으로 양쪽 구역이 제일 번화했다. 그동안 알바하러 지나치는 게 전부였기에 오늘은 주변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었다. 강가라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중앙에 등대가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나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던 강주호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게다가 나중에 돈을 벌면 등대를 빌려 오로지 나를 위해 불을 밝혀 프러포즈하겠다고 장담했었다. 등대 앞에서 청혼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어두운 밤의 불빛이 되어주는 존재로서 평생 지켜주겠다는 의도였다. 지난날의 추억이 떠오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하나둘씩 쌓여 마음이 점점 울적해졌다. 흐느낌은 어느새 대성통곡으로 바뀌었다. 강주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진심을 다했지만 고작 장난감 취급에 놀림당하는 신세에 불과했다. 휴대폰 알림음이 연신 울렸고 화면에 강주호의 문자가 수두룩하게 떴다. [은아야, 네가 사고 싶다는 가방 구했어.]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다른 선물도 샀거든?] [진짜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줘.] 문자를 보자마자 참으로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이내 휴대폰 전원을 껐고 주변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강변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지만 실상은 등대 주위만 맴돌았다. 마음이 심란한 나머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비는 언제나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몸을 적시는 빗물에 화가 금세 가라앉았고 시원한 느낌에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고개를 들어 초라한 몰골로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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