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붉은 해가 저물며 밤이 찾아왔다.
허 씨 가문.
거대한 신혼 방에는 거대한 신혼 침대가 있었다.
고연화를 허 씨 가문에 데려온 후, 허태윤은 그녀를 여자 도우미에게 맡기며 담담하게 지시했다.
“데리고 가서 수습해!”
우르르 몰려온 도우미는 그녀의 얼굴을 씻기고 화장을 시킨 뒤 전통 혼례복까지 입혔다.
옷이 무거워져 고개를 숙여 살핀 고연화의 눈에 앞에 있는 정교하고 비싸 보이는 구두가 보였다.
남자의 첼로같이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제대로 협조하면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마치 위로하는 듯 들렸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은 압박이 가득했다.
그 순간 고연화는 도망을 치려야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가 정확하게 그녀의 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어디로 도망을 가든 반드시 그녀를 찾아낸다는 뜻이었다!
고연화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좋아요. 협조하죠. 제가 먼저 건드리긴 했으니 대가는 치러야겠죠! 하지만 아저씨, 저한테 정확한 시간을 주세요. 얼마 동안 협조해야 하죠? 기한이 되면 우리 각자도생하고 서로 갈 길 갑시다!”
허태윤도 그녀에게 딱히 흥미가 없어 차갑게 대꾸했다.
“3개월이요.”
허태윤도 이 여자와 지나치게 오래 엮이고 싶지 않았다. 3개월이면 어르신이 수술 후에 요양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좋아요!”
고연화는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나름 받아들일 난해 먼저 남자의 큰 손을 잡았다.
“가세요, 아저씨! 가서 결혼 마저 하세요!”
순간 멈칫한 허태윤은 조용히 시선을 내려 고연화에게 잡힌 손을 바라봤다.
늘 신체 접촉을 꺼렸던 그였지만 놀랍게도 딱히 반감이 일지는 않았다.
고연화의 손은 아주 작고 부드러웠다.
……
허씨 가문의 결혼식은 고전적인 스타일이었다.
고연화는 허태윤과 함께 연회장에 도착해 간단한 전통 혼례를 올렸다.
그런 뒤 고연화는 신혼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방에 보내졋다.
허태윤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고연화는 여전히 얌전하게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은 남편이 신혼 방에 들어오길 기다리는 어린 새신부 같았다.
남자의 두 눈에 조롱이 깃들더니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일어나죠, 연기 그만하고.”
하지만 고연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을 알아챈 허태윤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따뜻한 불빛 아래 정령같이 자그마한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가늘고 긴 속눈썹은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얌전하고 조용한 얼굴에 입가에는 맑은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앉아서 잠이 들어버린 건가?
가까이 다가가며 어딘가 건드린 건지 자고 있던 고연화는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울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허태윤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안아준 덕에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고연화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품에 쓰러진 자그마한 여자에 허태윤은 순간 멈칫했다.
처음으로 고연화의 화장을 지운 진짜 얼굴을 보니 차가운 두 눈동자에 놀라움이 조금 깃들었다.
얼굴에 이상한 것을 그리지 않으니 나름 예뻐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낯선 사람의 숨결이 너무 가까웠던 탓인지 고연화가 별안간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다 자신이 남자의 품에 반쯤 안겨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두 얼굴은 바싹 붙어있었다.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친 고연화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뭐 하는 거예요? 경고하는데. 남녀가 유별해요, 우리 이거 형식적으로 하는 결혼이에요!”
조그마한 녀석은 눈을 뜨자마자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방금 전 만약 그가 고연화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분명 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어졌을 게 분명했다!
허태윤은 불쾌함에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그래요? 우린 형식적인 결혼이라고?”
미간을 찌푸린 고연화는 경계하며 말했다.
“아저씨, 지금 거짓말하려는 거예요? 우리 분명 약속했어요, 3개월 뒤면 이 관계를 끝낼 거라고요!”
허태윤은 입꼬리를 올렸다.
“난 3개월 뒤에 이 관계를 끝낸다고 약속했지만, 3개월 내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을 마친 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고연화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남자의 거친 손가락에는 얇게 굳은 살이 박혀 있어 위험한 힘이 느껴졌고 위압적인 기운이 몸을 짓눌렀다.
“아저씨, 사내대장부는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해요. 이렇게 억지 부리기 없어요!”
고연화는 허태윤을 단단히 노려보며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지만 남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온 허태윤은 지근 거리에서 그녀를 응시했다.
고연화의 얼굴이 한 덩어리가 될 정도로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코웃음을 치고 그녀를 놓아주더니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김칫국 그만 들이켜요. 그쪽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고연화는 비록 한시름을 놓긴 했지만 기분이 몹시 나빴다.
“하하, 그럼 걱정 없겠네요! 그쪽같이 다 늙어서 기력만 좋은 아저씨도 딱히 제 타입 아니거든요!”
“…”
다 늙어서 기력만 좋은 아저씨?
고윤화는 손을 들어 허태윤의 가슴팍을 찔렀다.
“아저씨, 미안한데 비켜주세요. 졸려서 씻고 자고 싶어요!”
허태윤은 고연화를 깔아보며 비켜주지 않았다.
고연화도 딱히 더 버티지 않고 스스로 비키더니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욕조에서 나온 고연화는 그제야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이제 큰일이었다!
신분의 혼례복은 너무 무거워 입고 있기엔 너무 불편했다.
잠시 고민하던 고연화는 욕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밖을 쳐다봤다.
허태윤은 아직도 있었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고연화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불렀다.
“크흠, 아저씨. 제가 오늘 입고 온 옷 돌려주세요!”
슬쩍 고개를 든 허태윤은 덤덤하게 고연화의 머리통을 보더니 말했다.
“버렸습니다.”
버렸다니?
고연화가 이를 악물었다.
“… 그럼 미안한데 깨끗한 옷 좀 빌려주세요!”
허태윤은 눈썹을 들썩이며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입니까?”
“그럼 제가 어떤 태도여야 하는데요?”
“부탁하세요.”
고연화는 쾅 하고 욕실 문을 닫았다.
됐다. 뭐 하면 계속 혼례복을 입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불편하면 불편했지 뭐!
고연화가 막 혼례복을 다시 입으려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작게 틈새만 보일 만큼 열자 허태윤이 보였다. 고연화는 짜증을 내며 물었다.
“왜요?”
문틈 사이로 욕실 안의 바디워시 향기가 풍겼다.
문틈 안의 여자아이는 타올 하나만 두르고 있어 하얀 어깨에 쇄골에 붙은 젖은 긴 머리가 유난히 유혹적이었다…
혈기 왕성한 남자인 허태윤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을 들어 남성용 잠옷을 그녀에게 건넸다.
멈칫한 고연화가 손을 들어 옷을 가져가려는데 허태윤이 짓궂게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고맙다는 말도 없어요? 응?”
“아저씨, 감사합니다…”
고연화는 입술을 꾹 다물고 웃은 뒤 옷을 휙 빼앗은 뒤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는 개뿔!”
말을 마친 뒤 다시 쿵 하고 문을 닫았다.
허태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손을 조금만 늦게 빼냈다간 팔이 문에 끼어 부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 고마운 줄을 모르는 꼬맹이였다!
허태윤의 잠옷은 고연화에게 보통 큰 게 아니라 입고 있으니 마대자루를 뒤집어쓴 것 마냥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지는 특히 엄청 커 계속해서 밑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