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보스, 왜 안 들어갑니까?"
윤호철이 물었다.
고연화는 걸음을 멈춘 채 허태윤이 차에서 내려 등봉 경매장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봤어. 우리 좀 늦게 들어가자!"
윤호철이 보스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저분은 허씨 가문의 허태윤 대표님인 것 같습니다! 보스, 저분을 압니까?"
고연화가 질색하며 대답했다.
"별로 안 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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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장은 일이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 층은 일반 구매자 좌석이었고, 이 층은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귀빈급 구매자들을 위해 특별히 제공되는 방으로,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졌으며, 방 번호로 구분되어 있었다.
허태윤은 일 번 방에 있었고, 고연화는 칠 번 방에 있었다.
평범한 골동품 몇 점이 낙찰된 뒤, 이번 경매의 메인인 청동기가 전시대 위로 올려졌다.
경매 진행자는 전문가답게 그 청동기의 시대적 배경과 소장 가치를 소개한 후, 가격 경쟁을 시작한다고 선포했고, 이십억 원부터 경매를 시작했다.
"삼십억!"
"사십억!"
"육십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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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동기는 결국 일 번 방 구매자가 거금 이백육십억 원으로 낙찰받아 모두의 주목을 샀다.
칠 번 방 안.
고연화는 나른하게 소파에 기댄 채 하품하는 중이었다.
‘아저씨는 청동기 사러 왔구나. 청동기도 이미 손에 넣었겠다, 뒤쪽에 물건들도 별 특색 없으니 곧 가겠지?’
"다음 경품은 유명 인상파 화가 청하의 유작 <가을 안행도>입니다. 경매 시작 가는 십억 원입니다!"
‘내 차례네.’
"삼 번 구매자, 십이억을 제시했습니다!"
"십일 번 구매자 십사억!.”
"오 번 구매자 십오억이요!"
고연화는 턱짓으로 윤호에게 카드를 들라는 신호를 보냈다.
"칠 번 구매자가 이십억을 제시했습니다!"
장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칠 번은 어느 거물이지? 손도 크시네!’
경매 진행자가 카운터다운에 들어갔다.
"이십억 한 번! 이십억 두 번, 이십억 세…."
막 낙찰되려던 참에 일 번 방에 있던 정시후가 갑자기 나서서 카드를 들어 올렸다.
경매 진행자가 너무 놀라 잠시 얼이 빠졌다가 흥에 겨워 외쳐댔다.
"일 번 구매자가 사십억을 제시했습니다!"
장내가 또다시 떠들썩해졌다.
‘바로 사십억이라고?’
‘일 번, 이거 칠 번이랑 한 번 붙어보려는 거 아니야?
고연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아저씨는 왜 아직도 안 갔대?’
윤호철도 불만을 토로했다.
"젠장, 허씨 가문 도련님은 왜 나서서 난리람? 자신이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야 뭐야!"
고연화가 냉정하게 말했다.
"호철아, 계속해!"
"예, 보스!"
"칠 번이 오십억을 제시했습니다. 더 높은 가격이 없습니까?"
"일 번 구매자가 또다시 육십억을 제시했습니다!"
"칠 번, 팔십억이요!"
"일 번, 백억이요!"
"백억 한 번, 백억 두 번…."
고연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지금 문제는 그녀의 손에 있는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윤호철이 제안했다.
"보스, 저 그림은 보스에게 매우 중요하니 우리 일단 공사비를 끌어다 씁시다!"
고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사적인 일로 회사 자금줄이 끊어지면 안 돼. 그림은 내가 알아서 손에 넣을 테니 오늘은 일단 저 아저씨한테 양보해!"
윤호철은 어쩔 수 없었다.
경매 진행자가 망치를 내리쳤고, 일 번 구매자가 최종 가 백억 원으로 <가을 안행도>를 낙찰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 번이 백억 원에 작품 가치를 몇 배나 초과한 그림을 사다니. 돈이 많으면 과연 제멋대로 살 수 있구나!’
고연화는 오히려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는 단지 여가 시간에 필명 청하로 그림을 그려 조금 이름 났을 뿐, 주류를 이루는 화가는 아니야. 작품도 인기 없는 편이고. 허태윤이 거금 백억 원에 <가을 안행도>낙찰받다니. 설마 그와 어머니가 어떤 연원이 있거나, 그가 어머니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안녕하세요."
경매장의 두 미녀 안내원이 커피와 디저트를 들고 들어왔다.
"고연화? 너! 네가... 어찌 여기 있어?"
한 여성 안내원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고연화가 고개를 들어 보니 송미연이었다.
‘A회사에서 잘려 경매장에 와서 안내원 노릇을 하나?’
송미연이 놀란 표정으로 고연화를 노려보더니 그녀 옆에 앉아 있는 명품 정장 차림의 잘생기고 돈 많은 윤호철을 보고는, 질투하며 이를 갈았다.
"고연화, 이 못된 년! 나는 너 때문에 직장을 잃었는데, 너는 오히려 부잣집 남자에게 빌붙어 잘살고 있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날카로웠다.
게다가 감정이 격해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지라 경매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한편, 일 번 방에서 나와 자리를 뜨려던 허태윤이 그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칠 번 방을 노려봤다.
송미연은 어제 입사해 아직 수습 기간이었는데 귀빈급 구매자에게 무례를 저질렀고, 경매장 안의 모두를 놀라게 했으니 그 영향이 극히 악랄했다.
경매장의 매니저가 다급히 보안요원을 데리고 와 송미연을 끌어내게 했고, 칠 번 방 구매자에게 거듭 사과했다.
송미연은 이 일자리도 또 날아갈 것을 알기에 경비원에게 끌려가면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보로 욕설을 퍼부어댔다.
"고연화, 이 망할 년. 또 날 직장을 잃게 하다니. 너는 언젠가 너에게 질린 남자들에게 버림받을 거야! 천한 년...."
‘잘못 들은 것이 아니야. 분명 누군가 고연화 이름을 불렀어. 그 여자가 여기 있다고? 방금, 칠 번 방에서 가격 경쟁을 벌인 자가 그녀였어?’
허태윤이 두 눈을 매섭게 번뜩이더니 몸을 돌려 칠 번 방으로 다가갔다.
윤호철이 끊임없이 사과해 대는 경매장 매니저를 내보내고 막 문을 닫으려던 차에 훤칠한 체격의 허태윤이 칠 번 방 문어귀에 나타났다.
"고연화가 여기 있어요?"
허태윤은 곱지 않은 눈빛으로 윤호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잠시 얼이 빠진 윤호철이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요?"
허태윤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더러 나오라고 하세요!"
윤호철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방 안을 향해 말했다.
"그쪽을 찾는 사람이 있으니 이리 나오세요!"
곧바로 안내원복 차림의 소녀가 칠 번 방에서 걸어 나오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허태윤을 바라보았다.
"저를 찾으셨어요, 고객님?"
허태윤은 눈앞의 낯선 여자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 이름이 고연화예요?"
여자 안내원이 말했다.
"고객님, 저는 고연아라고 합니다."
‘고연아?’
흥미를 잃은 허태윤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가 눈길을 돌려 윤호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 뒤, 허태윤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떴고, 정시후는 공손하게 제집 대표님 뒤를 따랐다.
허태윤이 멀리 간 것을 본 윤호철이 지갑에서 모 브랜드의 플래티넘 쇼핑카드를 꺼내 '고연아'라는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잘했어요. 가서 개명해요. 앞으로 그쪽 이름은 고연아예요!"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고객님!"
그 여자 안내원은 매우 기뻐하며 쇼핑 카드를 받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윤호철은 칠 번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갔습니다! 보스, 허태윤과는 도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죠? 왜 그를 피합니까?"
고연화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며칠 전에 그 사람이랑 결혼했어!"
윤호철이 커피를 한 모금 머금다가 모두 뿜어냈다.
"콜록콜록콜록… 뭐라고요?"
고연화는 담담하게 윤호철에게 사건의 경과를 대충 말해주었다.
윤호철은 깜짝 놀라더니 곧바로 사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신혼 첫날밤, 보스가 서울 제일 가문 도련님을 차지했어요? 나이 많은 성숙한 남자들이 사람을 아껴줄 줄 안다고 들었어요!"
고연화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한 대 맞을래?”
‘보스의 주먹은 정말 장난 아니지.’
윤호철은 재빨리 도망쳤다.
"보스, 그 뭐지. 저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고연화도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화장실에 갔다.
그녀는 남녀공용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윤호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던 고연화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거울 속에는 허태윤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뒤편에 서 있는 모습이 비쳤다.
‘하긴, 피한다고 피해지나!’
허태윤이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눈빛에는 그녀의 신분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고연화는 말문이 막혔다.
이때 윤호철이 남자 화장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보스,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요! 허태윤 그자는 원하면 세계 명화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우리랑 <가을 안행도> 낙찰 경쟁을 붙었죠! 정말 얄밉….”
그는 허태윤이 고연화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뒷말을 뚝 끊었다.
허태윤이 고개를 기울여 윤호철을 흘깃 보더니 또다시 고연화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보,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