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송서림은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차갑고 냉담하고 왠지 모를 아우라가 있어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사람일 줄이야. 적어도 그녀 혼자만 병원에 내버려두지은 않았다.
당시에 밤을 새며 기획안을 짜다 위가 아플 때, 부모님에게 알릴 엄두는 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고운성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 온 뒤, 검사를 다 마치기도 전에 고운성은 고객을 만나러 가야 한다면서 그녀를 혼자 병원에 내버려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고객이라는 건 사실은 고운성의 친구로 친구들끼리 오후 내내 게임이나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운성은 친구가 자신에게 고객을 소개해 준 것이라고 했었다.
그녀는 고운성의 성취욕을 이해했기에 딱히 뭐라고 따지지는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은 다 사업 욕심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고운성은 그냥 그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다행히 이제는 전부 깨달았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벨이 울렸고 신이서는 그 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간호사는 맞은 편의 초등학생의 바늘을 빼주었고 두 모자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떠났다.
신이서도 손을 마주 흔들며 문밖을 흘깃 쳐다봤다. 송서림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데 침대 옆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인 것을 본 신이서는 새로운 고객이 자신을 찾는 것일까 봐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당신 누구야?”
여자의 의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쪽에서 전화를 건 거 아닌가요? 전….”
신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빼앗아 간 송서림은 그대로 뚝 끊어버렸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송서림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렸다. 화가 난 듯 해 보였다.
“신이서 씨, 당신 위치 파악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당신이랑 결혼한 건 그냥 어머니 기분 맞춰드린 거지, 내 일에 끼어들 생각 따윈 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이서는 주변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니, 저….”
“차 키 줄게. 차는 바깥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어. 알아서 돌아가, 난 회사로 갈 거니까.”
탁하는 소리와 함께 차키와 죽 한 그릇이 테이블에 올려졌다.
신이서는 순간 흠칫해 정신을 차린 뒤 곧바로 자신의 가방을 찾았다. 옆에 있는 의자에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몸을 돌려 손을 뻗으면서 중얼중얼 해명했다.
“서림 씨, 오해예요. 전 정말로 당신 휴대폰인 줄 몰랐어요. 저희 휴대폰 기종이 똑같아서, 전 제 고객인 줄 알고 그런 거예요. 못 믿겠으면… 여기요.”
겨우 휴대폰을 꺼냈지만 송서림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진짜로 같은 기종인데.
그러게 누가 마음대로 휴대폰을 놓으랬나? 누가 번호를 저장하지 말랬나? 하지만 그 여자는 누구일까? 왜 자신의 목소리를 듣자 그렇게 화를 낸 걸까?
신이서는 더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죽 냄새를 맡자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은 기분에 더는 송서림이 화를 내는지 아닌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보자 싶었다.
……
송서림이 차를 타고 회사로돌아오자 서달수가 서 서둘러 다가갔다.
“대표님, 분부하신 사원증 나왔습니다.”
서달수가 프로그래머라고 적혀 있는 사원증을 건넸다.
“그래. 앞으로는 부하 직원에게 내 신분 노출시키지 말고. 그리고 사람 몇 데리고 우리 집으로 가.”
“별장으로요?”
“아니, 내가 잠깐 지내는 빌라에. 사람 몇 데리고 가서 거기 더는 사람이 살 수 없게 만들어 놔.”
송서림이 말했다.
서달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대표님?”
송서림이 대꾸했다.
“이유는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서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송서림은 등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 창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며 눈동자가 칠흑같이 어둡게 보였다. 신이서의 선 넘는 행동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위험한 기색이 어렸다.
그는 절대로 그런 여자랑 같이 살 수가 없었다. 부디 신이서가 눈치껏 알아서 물러나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별안간 울린 휴대폰 진동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방금 전에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여자가 받던데? 휴대폰 잃어버린 거야?]
떠보는 듯한 물음은 매 한 글자마다 고민을 거친 듯 다정하고도 조심스러웠다.
[무슨 문제.]
송서림은 여전히 공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별일 아니야. 이미 해결했어.]
[응.]송서림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곧바로 대화를 종료했다.
화면 속의 상대는 여전히 입력 중이었지만 끝내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
……
죽을 먹고 난 신이서는 또 반 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드디어 링겔을 다 맞았다.
그녀는 솜을 꾹 누른 채 병원 밖으로 나왔다. 초여름의 밤은 아직 조금 추웠던 탓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린 채 주차장으로 향한 뒤 키를 꺼내 차를 찾았다.
내비에 따라 그녀는 송서림의 집으로 향했다. 눈 앞에 펼쳐진 고급 빌라에 그녀는 조금 깜짝 놀랐다.
프로그래머들은 다 이렇게 벌이가 좋나?
이곳은 비록 서울의 노른자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 교통이 편리한 데다 온갖 시설들이 전부 구비되어 있어 시끄러움은 덜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게다가 송서림의 빌라는 이 주변에서 비교적 고급스러운 곳인 데다 대저택이기까지 했다.
‘이게 다 얼마야?’
신이서의 머릿속에서 가격대를 추론해 내기도 전에 경비가 차 창문을 두드리며 물었고 상황을 설명하자 경비가 대를 올렸다.
그녀는 차도를 따라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고 표지판을 따라 8단지의 주차 자리로 향했다.
주차를 한 뒤 그녀는 차에서 트렁크를 챙겨 엘리베이터로 들어간 뒤 카드를 찍고 12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감에 따라 심장도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정말로 결혼을 한 걸까? 남자와 동거를 해야 한다고?
신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긴장이 돼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캐리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신이서는 한껏 긴장한 채 송서림의 집 앞에 섰다.
조심스럽게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고급 아파트는 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
문을 연 그녀는 그대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 사람이 살 수 있는 걸까?
송서림은 분명 결벽증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사는 집은 왜 이렇게 돼지우리지?
아니 돼지우리라는 말도 과분했다.
이건 분명 쓰레기 장이었다.
입구에는 신발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양말도 있었다. 외투는 바닥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줍지도 않은 모양새였다.
쓰레기통이 가득 차면 그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고 소파에도 앉을 자리는 없었다. 각종 잡동사니에 옷에,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저기엔… 속옷도 있었다.
신이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 더러운 환경과 차갑고 냉담한 송서림을 연결 지을 수가 없었다.
이런 데 어떻게 지내라는 거지?
아니면 무슨 핑계라도 대고 집으로 갈까 싶었다. 어차피 송서림도 딱히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다만 전수미 쪽에는 말을 하기가 애매했다. 1억이나 써서 아들에게 아내를 찾아줬는데 별거를 한다니, 아무래도 말이 안 됐다.
하아.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 문 앞에 선 송서림은 손을 들어 시계를 쳐다봤다.
신이서와 헤어진 지 벌써 3시간이나 지났다. 예상대로라면 신이서는 그의 집을 보고 눈치껏 떠났을 것이다.
서달수는 사람을 보내 집을 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신이서같이 돈이나 밝히는 여자는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일 테니 절대로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역시도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여자가 필요했으니 각자 필요한 것만 취하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어머니의 기분이 좀 진정이 되면 위자료 좀 쥐여주면 깔끔하게 헤어질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바라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을 막 연 송서림은 저도 모르게 순간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