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전승군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가 이내 노발대발했다.
“소희연.”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그냥 예의상 묻는 거니까.”
소희연은 기운이 다한 듯 팔이 축 늘어지더니 아예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먼저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몇 명과 합방했어요? 저는 남이 쓰던 더러운 건 싫고 깨끗한 것만 좋아합니다.”
“널 죽여버릴 테다.”
전승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약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런 호사를 누리게 해줬을 것 같아요? 어차피 혼례도 치렀고 첫날밤인데 합방은 당연한 거지요.”
소희연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대군 얼굴도 제대로 못 봤네요...”
그는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살기를 띤 표정인데도 잘생긴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날카로운 눈썹에 눈동자는 먹물처럼 짙었다. 콧날은 오뚝했고 가늘고 긴 눈매는 깊으면서도 차가운 듯했다. 그리고 기품이 고귀하고 거만했으며 타고난 강인함과 맹렬함이 느껴졌다.
특히 지금처럼 분노에 휩싸였는데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잘생겼네요.”
소희연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거침없이 덮쳤다. 깜짝 놀란 전승군이 버럭 화를 냈다.
“죽고 싶은 것이냐? 썩 꺼지지 못할까!”
“성격도 참 불같군요. 제가 약 기운 때문이라고 했잖습니까. 사내는 손해 볼 일도 없을 텐데요.”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전승군은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피가 다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약에 취했다고 감히 날 해독 도구로 쓰려고? 그것도 첫날밤에? 이건 말도 안 돼.’
소희연은 힘겹게 그의 옷을 벗기면서 웃을 듯 말 듯 했다.
“만지면 뭐요? 더 크게 소리쳐서 저택 사람들이 다 구경 오게 해보십시오, 그럼.”
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인이 어쩜 이렇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로 그때 가늘고 뜨거운 몸이 바싹 다가왔다. 그는 굴욕감에 저항하려 했지만 몸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뜨거운 첫날밤이었고 뼛속까지 녹아드는 쾌락을 느꼈다.
...
이른 아침 햇살이 신방 안으로 쏟아졌다. 팔뚝 굵기의 촛불은 이미 다 타서 꺼져갔다.
침대 위에 누워있던 전승군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차갑고 잘생긴 얼굴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제 특별했던 첫날밤의 모든 장면이 무서울 정도로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전승군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몸의 혈이 완전히 풀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엉망이 된 침대 위로 핏자국이 묻은 면사포가 떨어져 있었는데 붉은 매화가 활짝 피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전승군은 차가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방은 텅 비어 있었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그 여인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감히 날 습격하고 해독제로 사용하다니. 간덩이가 부었어, 아주. 제대로 벌하지 않으면 성을 간다, 내가.’
분노에 휩싸인 전승군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경대에 어제 소희연이 썼던 관이 놓여 있는 걸 보았는데 그 밑에 쪽지 한 장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다가가 확인해 보았다. 머리 부분에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기별서?”
이마의 핏줄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화난 얼굴로 계속 읽었다.
“저 소희연과 지아비 전승군은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이 기별서를 작성합니다. 이후 각자의 길을 가고 남남으로 살겠습니다.”
맨 밑에 힘찬 서명과 붉은 지장이 찍혀 있었다.
전승군의 잘생기고 차가운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했다.
“소희연!”
분노가 폭발한 그는 기별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 경대를 쾅 하고 내리쳤다. 그 순간 단목으로 만든 경대가 산산이 부서졌고 정교한 관과 수많은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내 손에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을 것이다.”
...
일각 후 경성 전체가 긴급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수많은 갑옷 병사들이 일제히 출동하여 경성의 각 성문을 봉쇄했고 구석구석을 샅샅이 수색했다. 가는 곳마다 난리가 났고 사람들 또한 혼란에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오? 금군까지 출동했소.”
“아직도 모르오? 어제 혼례를 올린 승찬 대군 나리께 큰일이 났다던데.”
“어제 막 시집온 부부인이 오늘 아침에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하오. 게다가 기별서 한 장만 달랑 남기고 떠났다고 들었소.”
“세상에나. 그게 다 정말이오?”
“정말이지, 그럼. 승찬 대군 나리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금군까지 동원했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소희연을 잡으라 했다고 하더군.”
“어제 꽃가마에서 손목을 그어 자결하려 했다던데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승찬 대군 나리께 시집가기는 싫었던 모양이오. 혹시 승찬 대군 나리께서... 그쪽 면이 별로인가?”
“쉿! 그런 소리 함부로 해서는 아니 되오. 우리만 알고 있어야 하오...”
소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백성들은 명절이라도 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쑥덕거렸다. 그 바람에 단 하루아침에 온갖 황당한 소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승찬 대군이 사내구실을 못해서 부부인이 기별서를 남기고 도망쳤다는 소문. 소희연에게 다른 사내가 있었는데 밤중에 그 사내와 도망치고 승찬 대군을 버렸다는 소문. 그리고 소희연이 신방의 침상에서 승찬 대군에게 살해당해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고 승찬 대군 저택에서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가 도망쳤다고 거짓을 퍼뜨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정말 별의별 얘기가 난무했다.
주점의 어느 한 방 안.
소희연은 창가에 서서 거리에서 수색하는 금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냥 하룻밤 같이 잔 것뿐인데 호들갑을 떨긴. 자기도 분명 나랑 혼인하기 싫었으면서. 일부러 기별서까지 써서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더니 경성을 봉쇄하고 금군을 풀어서 날 잡으려 해?”
소희연이 분노를 터트렸다.
“나쁜 놈, 날 가질 땐 언제고.”
그녀가 고개를 돌린 순간 경대 거울에 소년의 누런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원래 모습과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다행히 내가 미리 준비해뒀지. 날 잡겠다고? 다음 생에나 가능할까?”
소희연은 얼굴을 만지면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의술과 독술에 능한 가문의 후예로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변장술쯤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전승군의 눈에 비친 소희연은 그저 소씨 장군 저택의 쓸모없는 딸로 멍청하고 못된 데다가 그의 얼굴에 반해서 계략을 꾸미고 명예를 잃게 만든 여인에 불과했다.
황제가 그녀 아버지의 체면을 봐서 혼인을 허락한 덕에 그녀는 순조롭게 승찬 대군 저택에 시집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희연’ 또한 다른 사람의 계략에 빠져 꽃가마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걸 전혀 몰랐다.
현재의 그녀는 현대 의술과 독술의 명가 후예인 소희연인 동시에 적대국 남산국의 장군 박유원이기도 했다. 일곱 나라를 떨게 했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남산국 태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두 번의 삶을 살았고 북진국 승찬 대군의 부인으로 다시 환생했다.
승찬 대군 전승군은 예리하고 수완이 뛰어나서 아주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의 곁에 있는다면 조만간 사실을 들킬 게 분명했다. 하여 혼인 둘째 날에 기별서를 쓰고 도망쳐 관계를 끊으려 했지만 뜻하지 않게 일이 꼬여버렸다...
소희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피하고 보자.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9개월 후, 만삭의 몸으로 도망치던 소희연이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대체 왜 아직도 날 잡지 못해 안달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