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다음 날, 온서빈은 집을 나와 교수님이 보내준 주소로 택시를 타고 곧장 달려갔고 예약한 자리에 들어서자마자 교수님이 반갑게 맞아주며 옆에 앉혔다. 동창회라 오랜만에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밥을 먹고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온서빈이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들어 확인하니 심유정의 로펌에 있는 인턴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반대편에서 당황한 인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빈 씨, 심 변호사님께서 또 위가 아프다는데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떡해요?”
온서빈은 숨김없이 인턴에게 평소 그녀가 먹던 약 두 가지의 이름을 알려줬고 저쪽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마지막엔 흐느끼는 듯한 인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빈 씨, 사무실에 없는 것 같은데 가져다줄 수 있어요?”
예전 같았으면 인턴의 말을 듣고 바로 가겠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없으면 가까운 약국에 가서 사거나 배달시키는 게 더 편하니까 제가 갈 필요는 없죠.”
그렇게 말한 뒤 바로 전화를 끊었고 이를 보고 침묵하던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네가 모든 걸 포기하게 만든 여자 친구?”
온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네가 출국하는 건 동의했어?”
교수님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온서빈을 바라보셨다.
과에서 1등을 차지하던 온서빈은 주얼리 디자인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었으며 열심히 하려는 의지도 있었기에 장래가 밝았는데 연애 때문에 여자 친구를 보살피느라 주얼리 디자인까지 포기했다.
그는 또다시 온서빈의 여자 친구가 동의하지 않아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포기할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온서빈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여자 친구가 동의하든 안 하든 이미 헤어지기로 결정했으니 상관없어요.”
무의식적으로 물어본 것만으로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던 교수님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좋아! 이래야 남자답지. 어떻게 여자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할 수 있겠어. 서빈아, 넌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이었어. 이 길을 계속 간다면 반드시 환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전에 한번 실수한 게 아쉽긴 해도 이번엔 꼭 성공해서 돌아와!”
온서빈은 그 말을 들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럴게요. 이젠 저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모임이 끝나고 온서빈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선 그가 불이 켜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파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심유정이 보였다.
처음엔 놀라다가 심유정인 걸 확인한 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심유정은 창백한 얼굴로 온서빈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뭐 하느라 이제 와? 내가 오늘 위 아픈 거 몰랐어? 왜 나 보러 안 왔어?”
연달아 이어지는 질문에 그에 대한 불만이 잔뜩 담겼지만 심유정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온서빈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안 간 건 정말로 일이 있어서 그런 거고 네 회사와 멀리 있는 내가 굳이 갈 필요는 없잖아. 사람 시켜서 사 오거나 배달시키는 게 더 빠르고 내가 가도 도와줄 방법은 없었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려는데 더 이상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심유정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온서빈! 너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온서빈이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예전엔 어땠는데?”
심유정이 몸이 살짝 떨리며 더욱 흥분할 것 같은 두 눈을 보자 온서빈은 미간을 꾹 누르며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심유정은 살얼음판에 갇힌 기분이었다.
“됐어, 시간도 늦었고 나 피곤하니까 진정 좀 해. 난 먼저 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