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어쨌거나 살아 있는 목숨이지 않은가? 그녀는 곧장 걸어가 육상철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맥박을 짚었다.
옆에서 육씨 가문에 연락하던 비서 김지원이 신지수를 발견하고 급히 외쳤다.
“이봐요! 뭐 하시는 거예요?”
신지수는 가뿐히 무시하고 그의 양복에 달린 브로치를 홱 낚아채더니 두말없이 육상철의 가슴에 푹 찔러넣었다.
어떤 혈자리를 자극했는지 모르겠지만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육상철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선혈과 함께 피멍울을 토해내더니 이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또한 신지수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김지원은 미처 제지할 틈도 없었다. 곧이어 질식해서 죽을 고비까지 갔던 육상철이 다시 살아났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김지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날 구해줬어?”
육상철이 물었다.
“어떤 젊은 아가씨인데 이름은 미처 물어보지 못했어요.”
김지원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사람 시켜서 조사해볼까요?”
목숨을 구한 은혜는 당연히 갚아야 하는 법이다.
육상철이 즉시 지시했다.
“당연하지.”
한편, 소식을 접한 육서진이 재빨리 현장에 도착했고, 공교롭게 또다시 신지수와 어긋나게 되었다.
사람을 구해주고 나서 신지수는 다시 차에 올라타 고개를 숙인 채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었다. 이때, 무언가를 느낀 듯 시선을 돌리자 마침 육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힐긋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눈빛은 마치 여느 행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한결같이 쌀쌀맞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육서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동안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디를 가든 만인이 주시하는 존재였는데 처음으로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심기가 다소 불편했지만 곧바로 자리를 떠나 육상철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작은 해프닝을 뒤로 하고 신지수는 드디어 알바하는 장소인 안심 한의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녀는 작년부터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학기 중에는 주말, 그리고 수능이 끝난 지금은 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하고 있다.
사실 일은 매우 간단했고, 약을 짓고 달이는 게 전부였다.
한의원에 들어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중간에 둘러싸인 명성이 자자한 노인이 바로 안심 한의원의 창시자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정상급 국의 대가였다.
그를 만나면 아무리 신분이 대단한 사람일지언정 공손하게 노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또한 노수정의 친아버지로서 그녀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했다.
전생에 그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1년 동안 한의원에서 일했고,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육서진에 의해 감옥에 갇힌 뒤였다.
다시 말해서 외할아버지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지수는 발걸음을 멈췄고, 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누군가에게 밀려났다.
“넌 눈도 없냐? 저리 비켜.”
이내 순순히 비켜주고 상대방이 지나가는 틈을 타서 발을 슬쩍 내밀었다.
“악!”
남자는 쿵 하고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신지수는 무심하게 똑같이 되받아쳤다.
“그 눈은 장식품인가? 남의 발은 왜 밟아?”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분명 본인이 양아치 짓거리하고 다른 사람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았는가?
마치 한 대 때린 다음 뻔뻔스럽게 얼굴이 손을 쳤다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르지?
바닥에 넘어진 남자가 펄쩍 뛰면서 곧바로 신지수를 두들겨 팰 기세로 주먹을 번쩍 들었지만 노현호의 호통 소리에 움찔했다.
“넌 염치도 없냐? 뭐 하러 애송이랑 똑같이 굴어?”
그는 손을 내려놓고 곁눈질로 신지수를 노려본 다음 굽신거리며 노현호의 뒤로 물러섰다.
노현호는 신지수를 힐긋 쳐다보고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문을 지나는 순간 누군가 한 마디 건넸다.
“노 선생님, 축하드려요. 따님께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았다고 하던데 친손녀가 한 명 더 생겨서 좋으시겠어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누가 봐도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이때, 다른 사람이 말을 이어갔다.
“후손이 많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노 선생님께서 원하는 건 안심 한의원은 물론 자신의 모든 의술을 계승 받을 수 있는 후계자이죠. 다만 아쉽게도...”
노씨 가문의 수많은 자녀 중에서 가장 재능이 있고 노현호가 제일 아끼던 사람이 바로 막내딸 노수정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능력에도 그녀는 한의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설령 부녀 관계를 끊을지언정 자신이 좋아하는 에스테틱 사업을 고집했다.
결국 노수정과 노현호의 사이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게 되었다.
노현호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10분 전에 육상철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지나가던 아가씨가 치료해줘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네요. 게다가 무려 브로치 하나로 응급처치했대요! 소문이 워낙 무성해서 가짜일 가능성이 있기도 해요.”
노현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듯이 진짜인지는 육씨 가문에 가서 확인해보면 알지 않을까요?”
“네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일행은 노현호와 함께 차에 올라탔고, 곧이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지수는 눈썹을 까딱하더니 한의원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약을 달이는 데 필요한 약봉지들이 쌓여 있었고, 다른 알바생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서둘러 손짓했다.
“신지수, 얼른 와. 오늘 할당량이 많으니까 농땡이 피우면 안 돼.”
“알았어.”
신지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일에 뛰어들었다.
약을 달이는 와중에 한의원 대가들이 사람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간간이 관찰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의 의술이 한의원의 그 어떤 대가 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복잡하고 까다로운 병도 손쉽게 치료가 가능했다.
다만 지금은 그녀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뿐이다.
일과가 끝나고 나니 벌써 오후 5시가 되었다.
신지수는 일당으로 받은 4만 원을 주머니에 넣고 안심 한의원을 나섰다.
입구에는 김병식이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다.
신지수가 차에 타자 그는 시동을 걸며 물었다.
“예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오셨나요?”
“네.”
철이 들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는 필사적으로 돈을 모은 기억밖에 없었다.
30분 후, 차는 신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으며, 신강욱 노수정 부부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소파에 앉아 있었고 옆에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신윤아가 보였다.
그리고 한쪽에 값비싼 선물과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신지수를 발견한 노수정이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지수야, 왔어? 좋은 소식이 있어. 곧 우리 가족에게 두 번째 경사가 있을 것 같구나.”
첫 번째는 아마도 친딸의 귀환일 테고, 두 번째는 신윤아가 주인공인 듯싶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는지라 묻지도 않았다.
이때, 정아가 불쑥 끼어들어 대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영광인 줄 알라는 듯 도도하게 말했다.
“이건 육상철 어르신께서 보낸 선물이거든요? 저희 아가씨를 위해 정상급 디자이너가 특별 제작한 한정판 액세서리이죠.”
이에 신윤아가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이 제지했다.
“됐어, 정아야. 그만 얘기해.”
이번 기회에 신지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는 정아는 제멋대로 과장하기 시작했다.
“강성시에서 육씨 가문과 신씨 가문이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죠. 다시 말해서 미래의 손자며느리에게 잘 보이려고 어르신이 오늘 이렇게 많은 선물을 보내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