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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할아버지에게 끌려서 억지로 연회에 오게 된 육서진은 어리둥절했다. 서프라이즈라니? 대체 언제 그녀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단 말인가? 그러나 며칠 전 신윤아가 선물해달라고 졸랐던 순간이 떠올라 제멋대로 오해하고 피식 웃었다. “좋으면 됐어.” 추측이 사실로 증명되는 순간 신윤아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눈에서 빛이 반짝이는 듯싶었다. 육상철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반전하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육서진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신윤아는 기쁨에 취한 나머지 육상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육상철이 별장으로 들어서자 차가 한 대 더 도착했다. 이를 본 신윤아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할아버지!” 그는 다름 아닌 노수정의 아버지, 그리고 안심 한의원을 창시자, 정상급 국의 대가 노현호였다. 둘은 한때 부녀 관계를 끊을 정도로 사이가 소원해졌고, 나중에 노수정이 먼저 백기를 들었지만 노현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 먼저 찾아온 적이 몇 년 전을 마지막으로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래.” 노현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곧장 안으로 걸어갔다. 비록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신윤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노현호의 뒤를 따라 별장에 들어섰다. 내부에는 손님들로 북적였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와중에 술잔이 오가며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신지수는 바로 이때 위층에서 내려왔다. 눈부신 조명 아래, 나선형 계단에서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왔고 마치 반주가 울려 퍼지듯 한순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내 고개를 돌리자 유유히 걸어 내려오는 연보라색 드레스 차림의 한 소녀가 나타났고,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여신처럼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등장하자 손님들 사이에서 탄성과 감탄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이때,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가 신씨 가문에서 다시 찾았다는 친딸이에요? 시골에서 온 촌뜨기라더니, 이게 무슨...” 외모는 물론 카리스마까지 겸비하다니. 최고급 맞춤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디자이너의 가장 완벽한 작품을 보는 듯싶었다. 훤히 드러난 쇄골은 유난히 눈에 띄었고, 잘록한 허리는 한 손에 잡힐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에 수놓은 작은 꽃잎이 나풀거렸는데, 그 아름다움은 차마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외모를 보면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고, 완벽한 얼굴형은 흠잡을 데 없다. 조명이 그녀를 비추자 가늘고 긴 속눈썹이 눈꺼풀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맑고 깨끗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면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다. 감탄과 질투가 뒤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신지수는 마지막 계단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신강욱과 노수정이 웃으며 신지수에게 다가가 모든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이쪽은 제 딸 신지수라고 합니다. 비록 친딸이지만 당시 실수로 다른 아이와 바뀌게 되었죠.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찾아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우리 가족이 상봉하는 순간을 축하하러 와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이어 축복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현장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기 시작했고, 신강욱은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접대를 하느라 바빴다. 반면, 노수정은 노현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신지수를 데리고 인사하러 갔다. 자기 딸은 본체만체하던 노현호는 정작 신지수를 마주하자 유심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때, 안심 한의원 입구에서 외손녀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넌...” 그는 깜짝 놀랐다. 사실 이번에 친히 찾아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육상철한테서 기가 막힌 명의가 고작 침 한 방으로 목숨을 살려줬다는 소문을 듣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끈질긴 추궁 끝에 비로소 노인네의 입에서 명의의 신분을 전해 듣게 되었다. 다름 아닌 신씨 가문이 다시 찾은 지 얼마 안 되는 친딸 신지수였다. 또한, 그의 친 외손녀이기도 했다. “의술을 아느냐?” 노현호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신지수가 눈을 깜빡였다. “조금이요.” 이 말을 들은 노현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니 질문을 이어갔다. “누구한테 배웠어? 스승이 있어?” “아니요. 독학했어요.” 신지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기대로 가득했던 노현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계집애가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스승도 없이 오로지 독학으로 침 한 방에 생명을 구하는 기술을 익힌다는 게 말이 되는가? 즉 신지수가 거짓말하거나 단지 운이 좋아서 육상철을 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노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다음에 한의원에 오면 약 달이는 잔심부름은 하지 말고 날 따라다니면서 많이 보고 배워. 참, 이건 외할아버지가 주는 첫 만남 선물이야.” 이내 말을 마치고 얄따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안에 현금은 없고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신지수는 망설이지 않고 덥석 받았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노현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뒷짐을 지고 떠났다. 옆에 있던 노수정은 전혀 대화에 끼지 못했고, 아버지가 자리를 비켜주자 그제야 신지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수야, 한의원에서 약 달이고 심부름하고 있어? 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거야?” “돈이 없어서요.” 신지수가 미소를 지었다. “하루에 4만 원이나 벌 수 있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노수정은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동안 신지수가 갖은 고생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가슴이 미어지고 죄책감이 들었다. 다만 아무리 속상하고 미안해도 돈이 되는 건 아니니까. 연회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지루함이 밀려온 신지수는 자리를 뜨려고 했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부딪힐 뻔한 순간 신속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상대방에게 치맛자락이 밟힌 탓에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지기 직전... “조심해!” 때마침 누군가의 손이 나타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머리 위에서 다정하면서 젠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다름 아닌 육서진이었다. 전생에 손이 부러진 신지수가 입양 딸이라는 신분으로 놀림과 조롱을 받고 있을 때 육서진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무서우면 손잡아 줄까?” 사춘기 소녀의 설렘은 늘 아무런 이유도,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감옥에 직접 처넣은 것도 모자라 막다른 골목까지 이르게 하고, 죽어 가는 모습을 싸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신지수의 안색이 싸늘하게 식어갔고, 무의식중에 혐오감이 든 나머지 거의 조건반사처럼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꺼져.” 신지수는 인정사정없이 한 마디 내뱉고는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육서진이 발 빠르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고, 말투는 여느 때처럼 겸손하고 예의를 갖추었지만 은근히 강압적인 태도를 내비쳤다. “지수 씨, 기껏 부축해줬더니 고맙기는커녕 욕부터 하는 건 좀 아니잖아?” 신지수가 냉소를 지었다. “그럼 일부러 남의 뒤에 서서 인기척도 내지 않은 건가?” 육서진은 말문이 막혔고, 표정이 어딘가 어색했다. 하지만 신사답게 먼저 사과를 건넸다. “미안. 사실 지수 씨를 부르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어. 내 잘못이야.” “잘못한 줄 알면 이만 비켜주시지?” 신지수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얼굴에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육서진이 되물었다. “날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은데, 지수 씨 심기라도 잘못 건드린 적이 있었나?” 더는 대화를 섞고 싶지 않은 그녀는 남자를 밀어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다지 소란스러운 편은 아니라서 사람들이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육서진을 찾으러 온 신윤아가 마침 두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분노와 질투가 차오른 나머지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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