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이번은 육현우가 처음으로 직원의 송별회에 참석한 것이다. 임하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케이크를 먹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몇몇 여직원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몰랐는데 대표님이 지영 씨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처음 알았어. 전에 다른 사람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밥을 살 때도 대표님은 다 오지 않았잖아. 그런데 지영 씨 송별회에 대표님이 오시다니.”
“그러게. 이상하네. 지영 씨가 평소에 그렇게 주목받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걸 눈치챘어? 오늘 밤 지영 씨 시선이 자꾸 대표님에게 가는 것 같아. 뭔가 숨겨진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설마? 지영 씨가 예쁘긴 하지만 평범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 대표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대표님 같은 사람이면 원하는 여자를 다 손에 넣을 수 있지 않겠어? 그런데 왜 지영 씨와 사귀겠어?”
“하나 씨, 안 그래요?”
임하나는 조용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질문을 던졌다. 그녀도 추측해 보기를 바라는 눈빛을 던졌다.
“...”
임하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이지영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하나 씨.”
이지영은 임하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하나 씨, 우리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 모자라요. 같이 게임 하지 않을래요?”
분명 물어본 거였지만 이지영은 그녀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녀를 바로 테이블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 게임 잘 못하는데...” 임하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지영은 또 그녀를 의자에 눌러 앉히고는 말했다. “잘 못하니까 해봐야 하는 거잖아요. 하나 씨는 항상 구석에만 있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도 같이 어울려요.”
임하나는 침묵을 지켰다.
지난번 캠핑 때도 이지영은 이렇게 술을 권했었다. 그 결과 임하나는 술에 취해 다른 텐트에 들어가 육현우와 잠자리를 가졌다...
잘못된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임하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이때 옆 의자가 당겨지며 육현우가 앉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지영조차도 놀란 듯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대표님도 게임 하는데 하나 씨도 같이 해요.”
“...”
임하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지영은 정말 사람의 약점을 잘 이용하는 듯했다. 임하나의 성격이 소극적이라 육현우를 거스르지 못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지영은 임하나의 다른 쪽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렇게 임하나는 육현우와 이지영 사이에 앉게 되었다.
“...”
임하나는 중간에 앉아 사랑하는 두 연인을 갈라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은 그들 셋을 제외하고 안은실, 강인하,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여직원과 두 명의 남직원이 있었다. 원래 남녀 비율이 딱 맞았으나 임하나 때문에 그 균형이 깨져버렸다.
두 라운드가 지나자 임하나는 대충 게임 룰을 파악했다. 벌칙 카드를 뽑은 사람은 진실게임이나 왕게임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 진실게임을 선택하면 다른 사람에게서 질문을 받아야 하고 대답하기를 거부하면 술을 마셔야 한다. 왕게임을 선택하면 ‘왕’이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고 이를 거부하면 역시 술을 마셔야 한다.
이 게임의 목적은 단순히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처음 두 라운드에서는 각각 남직원과 여직원이 벌칙 카드를 뽑게 되었다. 한 사람은 진실게임을 선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왕게임을 선택했다.
진실게임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연애를 몇 번 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여직원은 수줍게 한 번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남직원은 왕게임을 선택했는데 주어진 벌칙은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호기롭게 노래를 불렀다. 음정은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불러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임하나도 그들 따라 박수를 쳤다.
“무슨 게임을 이렇게 재미없게 해요?”
그러나 이때, 이 상황이 하찮은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안은실의 남자친구인 강인하를 바라봤다.
강인하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약간 지루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실게임을 이렇게 재미없게 하는 건 처음 봐요. 그럴 거면 그냥 윷놀이나 하지 그래요?”
“...”
안은실은 팔꿈치로 그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 사람들 내 직장동료들이야. 네 친구들처럼은 게임을 잘하지 못하지.”
강인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임은 계속되었고 아무도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 강인하가 받은 카드는 ‘왕’ 카드였다. 그 말인즉 벌칙 카드를 받은 사람은 그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거나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리고 진실게임 벌칙을 받게 된 사람은 마침 안은실이었다.
그녀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강인하를 바라봤다. “나 진실게임 선택할게. 물어보고 싶은 거 물어봐.”
강인하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두 번 두드린 후 물었다. “너 몇 번 해봤어?”
“...” 안은실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다.
“...” 주위 사람들도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강인하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임하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방금 차 안에서 강인하가 다른 여자와 스킨십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그녀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강인하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때 육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질문이죠?”
강인하는 눈썹을 치켜들더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는 안은실의 허리를 감싸안고 가볍게 웃었다. “우리 공주님, 대답 못 하겠으면 술 마셔.”
안은실은 그를 쏘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대답 못 한다고 그래? 세 번이야.”
“그래?” 강인하는 무심하게 반응하며 또 물었다. “그럼 유산은 몇 번 했어?”
안은실은 멈칫하더니 순간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강인하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안은실을 창피하게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평소 회사에서 보여준 거침 없는 모습에 의하면 강인하는 곧 안은실의 귀싸대기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안은실은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를 때리진 않았다. 대신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강인하, 지금 뭐 하는 거야?”
강인하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별 뜻 없는데. 이런 게임은 원래 자극적으로 가야지.”
“...”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건 자극적인 걸 넘어서 거의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공포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스릴이 넘쳤다.
안은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인하는 바로 그녀에게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마셔.”
안은실은 순순히 술을 마셨다.
만약 육현우가 없었더라면 안은실은 아마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거라고 임하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술을 마신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 번 더 해!”
새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벌칙 카드를 뽑은 임하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강인하를 바라봤다. 제발 그가 ‘왕’ 카드를 잡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강인하는 임하나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꿰뚫은 듯 자신의 카드를 보였다.
임하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강인하가 또 ‘왕’ 카드를 뽑았다.
강인하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임하나를 바라봤다. “다들 무슨 카드를 뽑았는지 한 번 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카드를 공개했다.
다른 벌칙 카드를 뽑은 사람은 이지영이었다.
강인하가 이지영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남자 한 명을 골라 키스해요.”
“...”
다른 사람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강인하가 내린 미션은 하나도 정상적인 게 없었다.
이지영은 육현우를 한 번 쳐다보다가 술잔을 들었다. “술 마실게요.”
술잔에 가득 찬 술을 다 마신 후 이지영의 눈은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임하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에 숨겨둔 카드를 더 꽉 쥐었다.
갑자기 육현우가 임하나의 손을 살짝 건드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육현우가 자신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