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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임하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어떤 배상금도 필요 없어요. 그냥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사과만 하면 돼요.” 안은실은 처음부터 잘못했고 더욱이 영상까지 증거로 나오면서 그녀는 이번 일에 대해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총괄비서님!” 안은실은 한승호에게 애교를 부렸다. 하지만 한승호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안은실 씨, 지금 임하나 씨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갈게요.” 한승호가 도와주지 않자 안은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때 한승호가 대기실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 “모두 하던 일을 잠시 멈추세요. 방금 일에 대한 조사가 끝났습니다. 안은실 씨가 지나가다 임하나 씨에게 부딪친 것이었고 안은실 씨가 잘못했으니 여러분 앞에서 임하나 씨에게 사과할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은 끝내는 거로 하죠.” 사람들은 모두 안은실과 임하나를 쳐다봤다. 상황이 이렇게 빠르게 반전될 줄은 몰랐다. 결국 안은실은 사람들 앞에서 임하나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임하나에 대한 그녀의 앙금도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하지만 임하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소이현을 만나 함께 다녔을 때도 그녀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었다. 그리고 소이현이 육성재와 사귀게 되면서 임하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마도 소이현에게서 크게 상처를 받은 탓인지 임하나는 이제 사람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 세상은 결국 만만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법이니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병원. 육현우는 휴대폰 화면의 가장 구석에 있는 임하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승호가 일을 처리하는 동안 육현우도 탕비실의 CCTV 영상을 되돌려보았다. 그래서 방금 전 안은실이 임하나에게 사과하는 상황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분명 잘못한 건 안은실이었지만 되려 적반하장으로 임하나에게 거만하게 굴었다. 안은실은 지금 주위에 있는 몇 명의 여직원들과 모여 있었고 임하나는 고슴도치처럼 혼자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육현우는 자신을 동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유독 임하나에 대해서는 모질게 굴 수 없었다. “현우 씨.” 이지영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육현우가 고개를 들더니 무심한 눈빛으로 이지영을 바라봤다. “날 뭐라고 불렀어요?” “현우 씨... 이렇게 불러도 돼요?” 이지영이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앞으로 우리 사귀게 되면 이렇게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현우 씨가 싫다면 다시 대표님이라고 부를게요.” 육현우는 잠시 침묵하고는 말했다. “그냥 원래대로 불러요. 할머니를 제외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요.” “알겠어요...” 고개를 숙인 이지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육현우가 휴대폰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왜 불렀어요?” “그게...” 이지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을 마시고 싶어서요. 혹시 물 좀 따라줄 수 있어요?”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부탁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와 육현우의 관계가 달라졌다. 이지영은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육현우를 바라봤다. 육현우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새로운 관계에 적응한 것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그녀를 위해 물을 따라줬다. 그녀가 물을 다 마시는 걸 보고서 육현우가 말했다. “난 먼저 회사로 돌아갈게요. 간병인을 구해줄까요?” “아니에요. 그냥 알코올 알레르기뿐인데요. 별일 아니라 괜찮을 거예요.” “그래요.” ... 며칠 동안 이지영은 출근하지 않았다. 육현우는 일 때문에 바빠 회사에서 그를 볼 일이 없었다. 4일째 되는 날, 이지영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안은실은 이지영에게 달려가 안으며 말했다. “세상에. 어디가 아팠던 거야? 나흘이나 쉴 정도로 심각했어?” 이지영은 말꼬리를 흐렸다. 안은실은 그제야 이지영이 오늘 평소와 다르게 입고 온 것을 눈치챘다. “오늘 왜 이렇게 입고 왔어?” 회사 규정에 따르면 직원들은 모두 정장을 입어야 했다. 이지영은 평소에 그 규정을 철저히 지켰지만 오늘은 네이비 블루 컬러의 원피스를 입고 짙은 화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주얼리까지 착용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지영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 오늘 사직서 내러 온 거야.” “사직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은실은 이지영의 손을 잡으며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이지영은 몇 마디로 어물쩍 넘겼다. 하지만 안은실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장난해?” “장난 아니야. 사직서 이미 냈어. 여러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했으니까 오늘 제가 저녁을 살게요. 장소는 단톡방에 올릴게요.” 이지영은 또 임하나 앞으로 다가가고는 말했다. “하나 씨, 저녁에 시간 되죠? 같이 식사해요.” 안은실과 다른 직원들은 임하나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봤다. 임하나가 사양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를 빼고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저녁에 다른 일이 있어서요.” 하지만 이지영은 꼭 임하나가 참석하길 바라는 듯했다. “같이 가요. 나 이제 회사 그만두니까 마지막으로 부탁 들어줘요. 대표님도 참석할 거예요.” 임하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대표님도 간다고? 정말이야?” 안은실과 다른 직원들은 이지영을 둘러싸며 웅성거렸다. “대표님 평소에 이런 직원 모임에 참석하지 않잖아요. 지영 씨가 초대한 거예요? 대표님이 온다고 했어요?” “그러게. 대표님 모시기 어려운 사람이잖아요. 저번에 총괄비서님 생일 파티에도 안 왔었는데.” 이지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미 대표님이랑 얘기를 끝냈어요.” “대박. 지영 씨 대단하네.” “지영 씨 장난 아닌데요? 계속 회사 다녔으면 총괄비서님과 동등한 위치에 오를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냥 이렇게 떠나버리다니 아쉽지 않아요?” “아쉽죠.” 이지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잖아요. 여자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이가 들면 소용없어요. 결국 결혼하고 아이 낳아서 가정에 충실해야 하는 거죠.” “그러면 결혼 때문에 회사를 관두는 거예요?” “남자친구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갑자기 결혼해요?” “남자친구 있는데 관계가 안정적이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제 결혼 얘기가 나오니까 나는 맞춰줄 수밖에 없죠.” 이지영은 반짝이는 눈빛을 보이더니 활짝 웃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무실 안은 너무 시끄러워 그들의 얘기에 별 관심이 없는 임하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임하나는 작은 칸에 앉아 있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닫히더니 이어서 안은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까 한 말 진짜야? 남자친구 있었어? 정말 회사 관두고 결혼하러 가?” “그래. 다 사실이야.” 이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인정했다. “우리 친구 맞아? 난 모든 비밀을 다 털어놓는데 넌 남자친구 있는 것도 나한테 숨기다니.” 안은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빨리 말해봐. 남자친구가 누군데? 작년 그 프로젝트에서 만난 장 대표? 아니면 지난달에 너랑 같이 밥 먹은 유 대표?” “다 아니야...” “그럼 누군데?” “지금은 말하기 좀 그래.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이지영은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말하기 싫으면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걸 안은실도 잘 알고 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결혼식은 언제 할 거야?” “빠르면 올해 말쯤 할 수 있을 것 같아.” 임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이지영과 육현우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마음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임하나는 그들이 떠난 후 화장실을 나가려 했지만 이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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