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여보세요?”
“나예요.” 이지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하나 씨, 지금 대표님과 같이 있죠? 어디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여기 긴급으로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대표님 사인이 필요해요.” 이지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임하나는 방문을 한 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럼 대표님에게 얘기할까요?”
“괜찮아요.” 이지영이 대답했다. “오늘 대표님이 프로젝트 때문에 바쁘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주소 나한테 알려주면 내가 찾아갈게요. 대표님이 서류에 사인만 하시면 되니까요.”
몇천억이 넘는 프로젝트를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임하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주소를 보냈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는데 날이 저물 때가 되고서야 눈을 떴다.
임하나가 방에서 나왔을 때 육현우와 한승호는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임하나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그들을 따라가려 했다.
육현우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
임하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는 남자들뿐이잖아요. 술이 들어가면 미쳐 날뛰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한승호가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하나 씨가 피해를 볼까 봐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임하나는 살짝 감동하면서도 약간 불안했다. “그런데 서 대표님이 저녁에 보자고 하셨잖아요. 제가 가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임하나는 몇천억에 달하는 프로젝트가 걱정되었다.
“괜찮아요.” 육현우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는 평온하고 차분해 사람을 안심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
엘리베이터에 들어가자 한승호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세상에 하나 씨처럼 순진한 여자가 또 있을까요? 서 대표가 저녁에 보자고 하니까 정말 가려 한다니. 이러다가 큰코다쳐요.”
육현우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책임감이 있어서 그래. 서 대표의 뜻을 거슬러 회사에 손해를 끼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한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무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요.”
이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여자들조차 출세를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 몸과 마음을 팔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 워낙 보편적이라 임하나 같은 맑은 샘물 같은 존재를 보면 오히려 눈에 띄고 마음이 아팠다.
육현우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엘리베이터를 걸어 나갈 때 그는 갑자기 뒤돌아 한승호를 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한승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네?”
“너무 깨끗한 거 말이야.” 육현우가 말하고는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육현우를 보며 한승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
서 대표와 일행들은 이미 룸 안에 도착했다. 육현우를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맞이했지만 오직 서 대표만이 자리에 꿈쩍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육현우의 뒤를 힐끔 바라보고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씨는 왜 안 왔어요?”
한승호가 대답했다. “하나 씨는 몸이 안 좋아서요. 대표님은 워낙 직원들을 위해 생각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 씨더러 쉬라고 하셨어요.”
“몸이 안 좋다고?” 서 대표는 코웃음을 쳤다. “오후에는 활기차 보이더니. 몸이 불편한 거야,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야?”
육현우는 의자를 끌어낸 후 자리에 앉았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나 씨는 우리 회사 직원일 뿐이에요. 서 대표님을 무시할 배짱도 없을 거예요.”
그러고는 두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제가 대신 같이 마셔드릴게요.”
육현우는 소주 두 잔을 쭉 들이켰다.
주변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서 대표는 여전히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 “육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니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보호하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육 대표님이 하나 씨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모두들 육 대표님이 여자를 멀리한다고 하던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표님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우리 대표님은 항상 직원들을 배려하시죠.” 한승호가 말했다.
서 대표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한 비서, 나 지금 육 대표님이랑 얘기하고 있잖아. 그런데 왜 끼어들어?”
한승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육현우는 손가락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얼굴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서 대표 일행도 억지로 미소 짓고 있는 듯했다.
룸 안의 분이기는 일촉즉발의 상태에 가까웠다.
바로 이때, 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할게요.”
“이지영 씨?” 한승호는 약간 놀란 듯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긴급 서류가 있는데 대표님 사인이 필요해서요.” 이지영은 서류를 들고 육현우 곁으로 갔다.
룸 안의 남자들의 시선은 모두 유일한 여자인 이지영에게로 향했다. 이지영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흰색 셔츠에 검은색의 몸에 붙는 스커트는 그녀의 라인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서 대표는 실눈을 뜨더니 흥미를 보였다. “이분은 누구시죠?”
“우리 회사 직원 이지영 씨입니다.” 한승호가 소개했다. “이지영 씨, 이분은 서 대표님이에요.”
이지영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상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했다.
“지영 씨 너무 미인이시네요. 육 대표님 비서예요?” 서 대표는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이지영의 허리에 시선을 돌렸다. “육 대표님 정말 복이 많으시군요. 비서마다 다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육현우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서류에 사인한 뒤 이지영에게 건넸다. “그만 돌아가요.”
“네, 대표님.” 이지영이 허리를 펴자마자 서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하나 씨 몸이 안 좋다고 하니 지영 씨가 우리 같이 술 마시는 건 어때요?”
말을 마친 후 그는 술잔을 들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지영 앞으로 걸어갔다. “지영 씨, 어때요? 같이 마시죠?”
그는 술잔을 이지영에게 건넸지만 이지영은 육현우를 바라봤다.
육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선 후 이지영 앞에 막아섰다. “서 대표님, 저랑 같이 마시죠?”
“우리 같이 비즈니스 하는 사이잖아요. 육 대표님 비서랑 술 정도는 같이 마실 수 있지 않아요?”
육현우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영 씨가 우리랑 같이 술을 마시면 계약하고 안 마시면 육 대표님의 성의가 부족하다는 걸로 받아들일게요. 그럼 더 이상 계약할 필요도 없죠.”
육현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서 대표님은 계약을 하는 조건이 여자인가요?”
“육 대표님은 아직 젊어서 모르나 본데 이건 암묵적인 룰이에요.” 서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다.
“서 대표님.” 이지영이 딱 좋은 타이밍에 입을 열고는 서 대표 손의 술잔을 받아 들었다. “우리 대표님이 장난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술을 엄청 잘 마시거든요. 같이 마시죠?”
이지영은 노련한 직원이라 몇 마디로 바로 상황을 진정시켰다.
곧이어 룸 안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술이 몇 잔 더 들어가자 이지영은 화장실로 가서 토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나올 때 육현우와 한승호가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이지영은 육현우를 부르면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육현우는 손을 들어 그녀를 부축하더니 한승호에게 말했다. “방에 데려가.”
“네, 대표님.”
“이거 놔요. 나 안 돌아갈 거예요.” 이지영은 한승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대표님, 저 취하지 않았어요. 나 돌아가서 서 대표님이랑 더 마실 수 있어요...”
그러는 사이에 이지영의 셔츠 단추가 몇 개 풀어져 옷깃이 열리더니 목선 아래 속살이 드러났다.
무심결에 그걸 본 육현우는 그만 제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이지영을 확 잡아당기더니 벽에 밀어붙이고는 목선 아래 드러난 멍들을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