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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때는 늦가을이라 네이비 롱코트를 입은 남자는 하얀 셔츠에 검은색 슈트를 매칭했다. 꼿꼿한 자태로 서 있는 모습은 마치 한 그루의 소나무를 연상케 했고, 흑요석 같은 눈동자로 소윤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입은 한일자로 굳게 닫혀 있었고, 이를 어찌나 깨물었으면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남녀를 발견하자 최성훈의 눈에 살기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소윤정과 1m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온몸으로 남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며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이 밀려오자 소윤정은 전대미문의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서리가 내린 듯 싸늘한 눈빛을 마주치는 순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최성훈은 평소 진지하기로 소문났고,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기에 얼굴에서 감정 기복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세 나타났다가 사라진 살인적인 눈빛을 똑똑히 포착하지 않았는가? 그는 침묵을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을 굴복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다. 송이준은 결제를 완료하고 유난히 경직된 소윤정을 보자 그제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짧은 머리에 남자다운 이목구비,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와 훤칠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게다가 타고난 기질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몸에 걸친 바바리코트는 그에게도 익숙한 제품이며, 바로 아르마니의 F/W 컬렉션의 최신상이다. 만약 일반인이라면 이런 제품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테니까. 결국 저도 모르게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정체를 금세 알아챘다. 그는 다름 아닌 강성시 갑부이자 소윤정의 남편 최성훈이다. 하지만 매체를 통해 보던 모습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는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눈빛은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두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최성훈의 시선에도 송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소윤정의 곁에 바짝 붙어 서며 비아냥거렸다. “최씨 가문 사모님께서 20만 원 병원비도 결제하지 못하는 거야? 다른 의미로 아주 대단한데?” 소윤정의 결혼 생활이 마냥 행복하지만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당장이라도 잘생긴 최성훈의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좋은 여자를 푸대접이나 해?’ 설령 사랑하지 않더라도 상처는 주지 말아야지, 그런데 정작 최성훈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오로지 혐오와 무관심뿐인 눈빛은 다른 감정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윤정은 송이준의 말을 듣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위해 불만을 토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가끔은 애초에 공평함과 거리가 먼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바로 사랑이다. 남녀 사이에서 먼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지기 마련이니까. 송이준이 굳이 그녀를 위해 최성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싫었던 지라 재빨리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최성훈의 눈에는 남자의 동물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윤정, 네 애인을 소개할 용기도 없는 거야?” 옆에 있는 남자부터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다시는 남의 소매를 함부로 잡아당기지 못하게 손가락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송이준은 개의치 않고 마치 최성훈을 열받게 작정한 듯 팔을 뻗어 소윤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윤정아, 쓰레기 같은 남자는 버리고 나랑 만나.” 송이준이 소윤정을 다정하게 껴안은 순간 최성훈이 다가왔다. 이내 어깨가 찌릿하더니 팔이 시큰거리고 저리며 피가 안 통하는 느낌에 마지못해 품에 안은 여자를 놓아줬다. 자유를 되찾은 소윤정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송이준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전설 속에서 볼 법한 수라장 같은 분위기를 평생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하준을 안은 송이준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먼저 돌아가 주시겠어요?” 아이가 있는 앞에서 어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만약 진짜 최성훈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면 아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송이준의 품에 안긴 하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다가 겁을 먹은 나머지 소윤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 안아주세요.” 아빠가 병원에 올 줄 몰랐던 지라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을 보자 차마 아는 체하지도 못하고 무의식중으로 엄마부터 찾았다. 송이준에게 안긴 하준을 발견하자 최성훈이 뒤에 있던 경호원을 향해 눈짓했다. 경호원은 곧바로 다가가 송이준의 품에서 강제로 아이를 떼어냈다. 녀석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 아빠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뾰로통한 모습으로 경호원의 품에 얌전히 기대어 자신의 병실을 가리켰다. 경호원이 하준을 데려가자 송이준은 더욱 거리낌 없이 소윤정에게 다가갔다. “윤정아, 남편이라는 놈이 내연녀 때문에 아들조차 나 몰라라 하는데 정녕 이런 사람과 평생을 같이 살 거야?” 소윤정은 실시간으로 치솟고 있는 최성훈의 분노를 고스란히 느꼈다. 이러다 자칫 잘못 건드려서 송이준이 큰 코라도 다칠까 봐 걱정되었다. 어쨌거나 최성훈은 강성시의 1인자로서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배,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가보세요.” 그러나 최성훈에게는 소윤정이 눈앞의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태껏 누군가를 이토록 걱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로 노려보았다. 하준이 아프다는 소리에 급하게 병실을 알아내고 강수아를 겨우 어르고 달래서 눕힌 다음 핑계를 대고 아이를 보러 내려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소윤정을 마주치는 순간 외간 남자의 품에 안겨 다정하게 애정행각을 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소윤정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목을 덥석 붙잡고 비상구로 질질 끌고 나갔다.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는 남자 때문에 소윤정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포악한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앞으로 끌려가면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내 쉬지 않고 변명했다. “성훈 씨, 내 말 좀 들어봐요. 선배랑 단지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 맹세코 사실이에요!” 그러나 홧김에 이성을 잃은 사람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거친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겨 아프든 말든 안중에도 없는 듯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송이준이 쫓아가려고 했지만 최성훈의 경호 실장 최도혁이 그를 막아섰다. 그리고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순간 최도혁에게 단숨에 제압당해 한쪽 팔을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최도혁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해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리시면 돼요.” 송이준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속수무책인지라 두 눈을 부릅뜨고 비상구만 초조하게 노려보았다. 배려란 찾아보기 힘든 최성훈의 몸짓은 거칠었을뿐더러 화풀이라도 하는 듯싶었다. 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바람에 소윤정의 손목이 어느새 빨갛게 부어올랐다. “성훈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송이준 선배랑 우연히 만났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강수아 씨랑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그쪽이 문제지, 자기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최성훈은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온몸으로 뿜어내는 아우라는 마치 그물처럼 그녀를 덮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결국 남자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비좁은 비상 통로는 어두컴컴했고, 오로지 ‘비상구’라고 쓰인 표지판에서 은은한 형광색 빛을 뿜어냈는데 마치 도깨비불 같았다.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도 전에 소윤정은 남자에게 밀려나 벽에 등을 쿵 하고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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