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3장

마치 칼바람이라도 불어닥친 듯 소윤정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갔고,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최성훈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끝내 실패하다니. 강수아는 최성훈이 원칙을 깨더라도 함께 하고픈 그런 존재였다. 최씨 가문에서 ‘강수아’라는 이름은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어에 해당했다. 설령 최성훈의 부모님일지언정 그 이름을 대는 순간 한바탕 전쟁이 일어날 정도였다. 어느 날 그녀가 서재에서 물건을 정리해주던 와중에 무심코 강수아의 사진을 발견하고 제자리에 놓으려는 순간 최성훈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노발대발하며 밖으로 내쫓고는 접근 금지령을 내렸었다. 강수아를 향한 최성훈의 마음은 진심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하준을 보며 소윤정은 기분이 착잡했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강수아가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짓을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발끈한 마음에 병실을 뛰쳐나가 모든 진료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아들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인지라 해열하기 위해서는 이 한 몸 바칠 작정이었다. 소윤정은 미친 사람처럼 모든 층을 누비며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다시 걸어 나왔다. 확인한 진료실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가슴이 빠른 속도로 내려앉았다. 단숨에 7층까지 뛰어 올라갔지만 의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준의 상황은 한시라도 지체하면 안 되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이때 무방비 상태에서 누군가의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소윤정은 흠칫 놀랐다. 창밖으로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둔탁한 빗소리는 왠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상대방의 품을 벗어나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부딪힌 건 아니었어요.” “소윤정?”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소윤정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리고 코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송이준 선배?” 지난 5년 동안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이름 석 자는 어느새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졌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이미 잊힌 추억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맞은편의 남자는 5년 전에 비해 더욱 멋지고 잘생겼으며 분위기마저 한층 성숙되었다. 세월은 마치 그를 비껴간 듯싶었고, 5년 전과 달리 그윽해진 눈빛은 경험과 연륜이 넘쳐났다. 소윤정을 발견하는 순간 남자는 기쁘면서도 놀란 얼굴로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오랜만이야. 병원에는 웬일이지?” 그가 너무 감격한 나머지 손을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소윤정은 심히 당황했다. “일단 놔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 앞에서 이 무슨 초라한 몰골인가? 5년 전 그녀는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결혼식도 축복도 없이 최성훈의 아내가 되었다. 당시 송이준은 최씨 가문 별장까지 찾아와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며 설명을 요구했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 서서 자신이 나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정작 그녀는 비겁하게 회피했다. 나중에 송이준이 유학길에 오르면서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난 적이 없었다. 지난 일을 회상하자 소윤정은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송이준을 다시 만나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그녀는 얼른 의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제야 흰색 가운을 입은 송이준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내과 주임’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윤정의 눈이 반짝 빛났다. “선배도 의사예요?” 송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응.” 소윤정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소매를 붙잡고 앞으로 끌고 갔다. “질문은 사양할게요. 일단 따라오세요.” 5년 전 송이준은 어머니에게 소윤정을 좋아하니까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가 강력한 반발을 얻었다. 결국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송이준의 어머니는 아들을 유학 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소윤정과 헤어지기 싫어서 같이 가자고 설득하던 찰나 그녀가 갑자기 최씨 가문에 이사 가더니 최성훈에게 시집갈 줄은 몰랐다. 심지어 고백조차 제대로 못 해 보고 유학길에 올랐다. 결국 시간이 흘러 이는 그에게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이제 와서 솔로인 신분으로 소윤정을 다시 만나게 되자 저도 모르게 가슴 속에 파문이 일렁거렸다. 따라서 그녀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뒤를 쫓아 소아병동으로 향했다. 송이준은 하준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즉시 검사를 실시했다. “증상이 얼마나 지속되었어?” 심상치 않은 아이의 모습에 그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고 치료에 몰두했다. 그리고 해열 주사를 놓고 나서 하준을 품에 안고 얇은 담요를 덮어준 다음 병실을 나섰다. “이럴 때는 아이를 데리고 움직이면서 땀을 흘리게 하면 열이 좀 내릴 거야.” 이내 녀석을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B2 버튼을 눌렀다. “내가 알기로 지하 2층에 평소에 직원들이 쓰는 작은 체육관이 있어. 지금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아이랑 같이 운동하면서 땀을 흘리면 좀 괜찮아질 거야.” 본인이 좋아하는 여자가 자식을 위해 발만 동동 구르는데 정작 아버지라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송이준의 마음에 다시금 욕망이 일렁거렸다. 소윤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병실에 돌아가서 텀블러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담요까지 한 장 더 챙기고 나서야 소윤정은 잰걸음으로 송이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 체육관에 도착했다. 물론 과도한 운동을 시키지는 않았고, 단지 하준의 손을 잡고 체육관을 두 바퀴 돌았다. 곧이어 녀석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윤정은 아들에게 얼른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먹이고 타올로 땀을 닦아 주면서 아이의 체온까지 측정했다. 비록 열이 있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고 손이 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얼굴로 송이준을 바라보았다. “선배! 고마워요. 오늘 선배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속수무책이었을 거예요.” 송이준은 무심한 얼굴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우리 사이에 고맙기는. 아이 아빠는 어디 있어?” 소윤정은 흠칫 놀라더니 입을 꾹 닫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 “아이 아빠는 야근해서 시간이 안 돼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확신이 없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자 송이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했고 마치 속마음까지 훤히 꿰뚫어 볼 기세였다. “윤정아, 넌 남을 속일 사람이 아니야.” 거짓말이 들통나는 순간 소윤정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고개를 떨군 채 주먹을 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고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된 것을 확인하자 송이준은 지압 판에 데려가서 혼자 놀게 했다. 그리고 다시 소윤정의 앞에 다가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널 찬밥 신세 취급하는 거야?” 소윤정이 재빨리 변명했다. “그게 아니라...” 이때, 송이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이가 아픈데 정작 아버지라는 놈은 강수아랑 같이 있어? 윤정아, 솔직하게 말해 봐. 이게 네가 원한 결혼 생활 맞아?”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