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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강성시, 강성 병원. 땅거미가 진 저녁 무렵.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르는 병실에서 링거를 맞고 있는 하준이 힘없는 모습으로 나지막이 애원했다.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 고열 때문인지 아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창백한 입술은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군데군데 하얀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소윤정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고, 다정한 손길로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하준이, 착하지? 아빠는 일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어. 엄마가 곁에 있어 줄 테니까 괜찮지?” 이내 면봉으로 미지근한 물을 묻혀 아들의 갈라진 입술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하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요!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엄마, 아빠한테 연락해서 오라고 하면 안 돼요?”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고, 표정은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부탁을 거절하는 순간 아이는 곧장 울음을 터뜨릴 게 뻔했다. 소윤정은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5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아내를 향한 최성훈의 증오는 줄곧 이어졌다. 자신을 미워하는 만큼 아이에 대한 애정도 0에 가까웠는지라 설령 연락하더라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아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실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자식을 엄마로서 어찌 거절하겠는가? 결국 씁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연락 한 번 해볼게.” 최성훈이 그녀의 전화를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간절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를 도무지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 비록 수모를 당할지언정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녀석은 비로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얌전히 기다렸다. 소윤정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내 이를 악물고 용기를 내어 익숙하기 그지없는 번호를 눌렀다. 뚜- 그러나 통화 연결음만 연신 울리고 받는 사람은 없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순간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그녀에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성훈 씨가 나랑 같이 있는 거 몰라요? 왜 하필이면 이때 연락하죠?” “성훈 씨, 가만히 있어. 뽀뽀 좀 하게.” 소윤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식어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도 알고 있었고, 바로 최성훈의 유일한 사랑 강수아였다. 5년 전, 최씨 가문은 소씨 가문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보답하기 위해 최성훈과 결혼을 강행했지만 여태껏 그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설령 침대에서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도 강수아의 이름을 불렀던 남자이지 않은가? 소윤정은 손끝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강수아의 말을 더는 들어줄 용기가 나지 않아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뒤돌아서는 순간 간절한 얼굴로 바라보는 아들을 발견했다. “아빠 뭐래요?” 소윤정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묵부답했다. 그렇다고 아이한테 아빠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다른 여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한참이 지나도 아들을 달래줄 핑곗거리를 찾지 못해 아랫입술만 꼭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아직도 열이 펄펄 끓는 하준은 비몽사몽 한 와중에 아무 대답 없는 엄마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 설마 아빠한테 전화 안 했어요?” 녀석은 몸이 아파서 아빠의 관심이 필요했고, 옆에 있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소윤정의 아랫입술은 이미 피가 배어 나왔고, 입안에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아이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준아, 아빠가 바빠서 벨 소리를 못 들었나 봐.” 이런 궁색한 변명으로 아이를 속일 수 없었다. 녀석은 힘겹게 일어나 앉아 이마에 붙어 있는 해열 패치를 떼려고 했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만약 병원까지 오기 힘들다면 목소리라도 들려줘요.” 소윤정은 버둥거리는 아이의 팔을 서둘러 붙잡았고, 이내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 알았더라면 당시 소씨 가문에서 최씨 가문에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을지언정 최성훈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자신을 제지하는 엄마 때문에 하준은 해열 패치를 떼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입을 꾹 닫은 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철이 든 아들을 보자 소윤정의 가슴이 더욱 아팠다. 결국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더니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이내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고 속으로 제발 전화 받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했다. 통화 연결이 실패하는 순간 녀석도 포기하고 더는 아빠한테 연락하라고 떼쓰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외로 상대방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싸늘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는데 차분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대꾸하는 사람이 없자 최성훈의 말투에 짜증이 짙게 배어 있었다. “대답해!” 소윤정은 혐오감이 가득한 어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비록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아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하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저예요.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문안 와주시면 안 돼요? 강성 병원 16층 30호에 있어요.” 아이는 남자의 짜증 섞인 말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쉴새 없이 입을 놀리며 조잘거렸다. “아빠, 너무 보고 싶어요. 만약 너무 바빠서 시간이 안 된다면 영상 통화해주세요. 네? 하준이도 아빠가 필요해요. 다른 친구들은 아빠가 매일매일 데리러 오는데 저만 혼자예요.” 아이의 간절한 애원에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단지 몇 초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빠 바빠.” 바쁘다는 소리에 녀석의 앙증맞은 얼굴은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의젓하게 소윤정의 휴대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일 보시고 이만 끊을게요. 항상 건강 조심하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통화는 금세 끝났고, 소윤정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아들의 야윈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최성훈은 그녀를 싫어하는 만큼 아들에 대한 애정도 거의 없었다. 아니면 이렇게 착하고 의젓한 아이는 온 가족의 사랑을 받고도 남았을 테니까. 약효 때문인지 하준은 금세 그녀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소윤정은 조심스럽게 아들을 내려주고 이불을 여미었다. 그리고 턱을 괴고 앉아 병상에 누워 있는 최성훈의 미니미 버전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최성훈과 이혼해서 강수아와 이어준다면 모녀를 대하는 최씨 가문의 태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액을 다 맞자 소윤정은 간호사를 불러 주삿바늘을 빼달라고 했다. 그리고 복도로 나와 병원비를 확인하러 프런트로 향했다. 하지만 걸어가는 와중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최성훈의 훤칠한 모습을 발견했다. 선두에 서서 걷는 남자의 뒤로 최씨 가문의 경호원들이 보였다. 블랙 슈트는 남자의 우월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모델 못지않은 황금 비율을 자랑했다. 특히 곧게 뻗은 다리는 마치 가슴부터 이어진 듯 유독 눈에 띄었다. 준수한 이목구비와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색 눈동자는 거만하면서 싸늘했고, 눈빛은 온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그리고 옆에는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깡마른 몸매와 창백한 안색, 손바닥만 한 얼굴의 여자는 남자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강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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