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임신한 송여월
멈칫한 송여월은 멍한 얼굴로 의사를 쳐다봤다.
“저….”
송여월이 넋을 놓고 잇는 것을 본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인은 법적 책임을 저야 하는 겁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제가 환자 아내입니다.”
나는 의사 곁으로 다가가 펜을 받은 뒤 사인했다.
그 의사는 나를 쳐다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보호자 확실해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은 나는 송여월을 흘깃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애인도 보호자에 속한다면 저 여자도 맞아요.”
말을 마친 나는 한쪽의 벽으로 향해 몸을 기댔다. 우리를 쳐다보는 의사의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참 복잡한 관계야.’
송여월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이었다. 의사에게 다가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발 꼭 그 사람 구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의사는 별다른 말 없이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
벽에 기댄 채 몇 분 서 있으니 다리가 저려와 진한일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진 비서, 전 일이 있으니 먼저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또 연락해요.”
내가 가려는 것을 본 진한일은 순간 멈칫했다.
“사모님, 이렇게… 가시려고요?”
입술을 꾹 다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옆에 서 있는 주영백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도 돌아가요. 염정훈 안 죽어요.”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병원을 나섰다.
“송여은.”
병원 밖, 송여월이 쫓아 나왔다.
정말이지 사람 뒤꽁무니 따라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데다 아침에도 또 잠을 방해받은 탓에 나는 지금 송여월과 말싸움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본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말해, 무슨 일이야?”
“너 언제 지훈이와 이혼할 거야?”
송여월은 나를 보며 놀랍게도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잠시 멈칫한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이혼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송여월은 꽤 몹시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너도 봤잖아. 지훈이는 기꺼이 나를 위해 목숨도 희생해 줄 수 있어. 너희 둘은 애초에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지훈이와 나를 방해하는 거야? 네 그 더러운 과거만으로도 넌 계속해서 지훈이의 곁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어. 나와 지훈이가 남은 여생을 함께 보낼 수 있게, 그만 지훈이를 떠나.”
너무 피곤해 정말로 쓸데없는 말할 할 기력이 없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혼하라고 하는 거 그래, 알겠어. 염지훈에게 직접 얘기하라고 해.”
피곤함에 미간을 꾹꾹 누른 나는 곧장 등을 돌려 떠나려고 했다.
“나 임신했어.”
송여월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지훈이의 아이야. 두 달 됐고, 너희가 본가로 돌아갔을 때, 그때 생긴 거야.”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 머릿속이 웅웅 울렸다. 송여월이 임신했다고?
두 달 전에?
아, 떠올랐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나와 염지훈은 본가로 돌아갔고 원래는 나와 함께 본가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지만 야밤에 갑자기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더니 먼저 떠나버렸었다. 당시만 해도 본가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줄 알고 붙잡지 않았었는데 송여월과 아기를 만들러 간 것이었다니.
마음속에 수천 평의 씨들이 발아하는 것만 같았다.
“송여은, 너도 잘 알겠지. 나에게 아이가 생긴 이상 염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네 편에 서지 않을 거야. 여사님도 염씨 가문의 자손이 사생아라는 이름을 지게 하지도 않을 거고. 게다가 너랑 지훈이는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잖아. 이 결혼, 너 이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송여월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치명상을 입히고 있었다. 확실히, 나와 염지훈은 2년 동안 늘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서로 간 암묵적으로 아이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염지훈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급하게 가지지 않으려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내가 낳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눌러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감정이 격해져 조금 붉어진 송여월의 얼굴을 본 나는 잠시 멈칫하다 웃으며 말했다.
“송여월, 논리적으로 봤을 때 나랑 염지훈이 이혼을 하려면 뭐가 됐든 나한테 직접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어? 왜 번마다 네가 먼저 찾아와서 이혼을 하라고 떠미는 거야?”
몸을 굽혀 가까이 다가간 나는 느릿하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염지훈은 나랑 이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를 찾아와 떠미는 거고? 보아하니, 네가 말하는 염지훈의 사랑은 뭐 별거 없나 본데?”
“너….”
송여월의 얼굴에 서러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송여은, 우쭐해하지 마. 지훈이가 먼저 너한테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 건 가정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 거야. 네가 다치지 않게 체면 있게 염씨 가문을 떠나게 하려는 거니까 주제를 알아. 이제 내가 임신까지 한 마당에 네가 언제까지 옆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나는 웃음이 다 나왔다.
“네가 말했잖아, 염지훈은 가정 교육을 잘 받았다고. 만약 내가 먼저 꺼내지 않으면 당연히 나에게 강요를 하지 않을 테니, 내가 하루라도 이혼을 하지 않으면 네 배 속의 아이는 여전히 얼굴도 못 들고 다닐 사생아야. 송여월, 네 배는 하루하루 커질 텐데 나중에 사람들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거야? 너와 염지훈의 불륜으로 생긴 아이라고? 넌 염씨 가문이 명분도 하나 없는 내연녀 때문에 나에게 이혼을 종용할 것 같아?”
송여월의 조금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송여월, 너 설마 이 세상에 너만 아이를 낳을 줄 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염씨 가문에서 손주를 얻고 싶으면 그냥 나한테 낳으라고 하면 돼. 뭐 하러 굳이 이혼녀에게 명분도 없는 아이를 낳으라고 하겠어?”
“너….”
한참이 지나도록 제대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송여월은 나를 뚫어지게 노려만 보며 분만 삼켜댔다.
그 꼴을 보니 기분이 적잖이 좋아진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뒤 등을 돌려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