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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내가 바로 호구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특별히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염지훈은 화가 난 듯했지만 드러내지는 않은 채 흰죽을 한 입 맛 본 뒤 나를 쳐다봤다. “맛이 너무 심심해. 못 먹겠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다른 건 못 먹는대.” 염지훈은 미간을 까닥하며 얇은 입술로 말을 건넸다. “소금도 안 돼?”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성질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 찾아볼게.” 이미 새벽 시간대라 병원 밖의 노점상들은 거의 철수하고 없었다. 병원 주변을 한 바퀴 헤맨 끝에서야 24시간 편의점을 찾을 수 있어 소금을 살 수 있었다. 또 공연히 트집을 잡을까 사는 김에 설탕도 함께 구매했다. 아침에 전지안과 한참을 쇼핑하고 돌아다녔던 데다 지금 또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신발에 발뒤꿈치가 까져 피가 나는 바람에 병원에 도착했을 땐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겨우 병실에 돌아오니 정말 공교롭게도 송여월도 있었다. 온 지 얼마나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절반쯤 깎은 사과를 손에 든 채 다정한 눈빛으로 염지훈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집에서는 잠이 안 오더라. 병원에 와서 네 곁에 있으니까 마음이 좀 놓여. 지훈아, 다음에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굴지 마, 나 때문에 그렇게 큰 모험하지 않아도 돼.” 다 낮은야밤에 서로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숙여 편의점에서 사 온 소금과 설탕을 쳐다봤다. 조금 웃음이 났다. 지금 나도 모르게 호구가 된 건가? 병실 안에 잠깐 침묵이 감돌더니 염지훈이 입을 열었다. 피곤한 듯 조금 담담한 목소리로 그는 송여월을 보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어. 진한일에게 바래다주라고 할 테니까 가서 쉬어.” “싫어.” 송여월은 매력적인 맑은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입원하는 데 혼자 두려니까 마음이 안 놓여. 돌아가서도 못 잘 것 같고, 여기 네 옆에 남아 있을래.” 염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챙겨줄 사람 있어. 그만 돌아가.” “사람이 어딨는데? 이렇게 시간이 늦었는데, 옆에 있게 해줘.” 애걸복걸하는 송여월은 염지훈이 싫다고 했다간 그대로 울어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원래는 그대로 가버리려고 했지만 병실 안을 쳐다보다 별안간 염지훈의 담담한 눈빛과 시선이 마주쳐버렸다. 역시, 방금 전에 말했던 사람은 바로 호구인 내가 분명한 듯했다. 정말 웃음이 다 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가서 푹 쉬라고 하고 밤새 간호는 나더러 하라니, 나는 뭐 그냥 무료 간병인이라는 건가? 속이 너무 상해 병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송여월을 향해 말했다. “그럼 언니가 오늘 밤 남아서 언니네 지훈이를 잘 보살펴 줘.” 송여월은 갑자기 내가 나타나자 조금 놀란 듯 순간 멈칫했다. “너 언제 왔어?”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염지훈을 흘깃 쳐다봤다. “온지 좀 됐어.” 염지훈이 있어서인가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은아, 오해하지 마. 난 그냥 지훈이가 걱정돼서, 그래서 찾아온 거야. 오늘 사고는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나 때문에 지훈이가 사고가 난 거니까 지훈이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지훈이도… 좋은 마음으로 그런 거야.” 가련하고도 무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속이 역겨워졌지만 그래도 억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염지훈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언니는 정말로 당신이 많이 걱정되나 봐. 오늘 밤엔 언니더러 남아서 보살펴주라고 해. 어때, 염 대표?” 미간을 찌푸린 염지훈은 아예 내 질문은 무시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말하지 않을 땐 그래도 괜찮았지만 염지훈이 입 밖으로 내니 속에서 열불이 터져 나왔다. 나더러 심부름을 시켜놓고 자기는 여기서 애정행각이나 하면서 얼마나 편하게 지내고 있는가. “밖에 공기가 좋아서 좀 오래 있었어.” 그렇게 말한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은 보지 않은 채 곧장 침대 곁으로 다가가 식어버린 흰죽을 들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이 식었네. 염 대표, 이따가 언니에게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흰죽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냅킨을 뽑아 손을 닦았다. “언니, 여긴 언니한테 부탁할게.” 이내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염지훈에게 말했다. “염 대표,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푹 쉬어.”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병실을 나갔고 사 온 소금과 설탕은 당직을 서는 간호사들에게 주었다. 염지훈에게 약을 갈아주러 온 간호사는 봉투 안의 것이 쓰레기인 줄 알고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쳐다봤다. “저기요, 이거 쓰레기예요? 왜 쓰레기통에 안 버리시고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음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염지훈을 흘깃 쳐다보다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 다 쓰레기예요.”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병원을 떠났다. …… 이튿날, 월요일.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선 나는 별장 밖에 세워진 염씨 가문 본가의 차량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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