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발표회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해당 일은 얼마 안 가 바로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권해솔은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이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집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정채영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살아. 개를 풀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덕분에 속이 뻥 뚫렸어!”
권해솔은 태블릿을 내려놓은 후 고개를 돌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고층 빌딩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본가에서 나온 건 대학교를 다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다들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하지만 권해솔은 달랐다. 그녀는 집에서 나온 뒤에야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권해솔이 과거의 기억에 흠뻑 젖어있던 그때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정채영이 보낸 것으로 50초나 되는 기다란 음성 메시지였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권해솔은 그녀가 보낸 음성의 절반가량이 다 웃음소리라는 걸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성 메시지를 들어보니 쾌활한 웃음소리부터 들려왔다.
권해솔은 기분 좋게 정채영과 대화를 나누다 문득 강재하의 얼굴이 떠올라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너 시간 괜찮으면 7년 전에 내가 물에 빠졌을 때의 자료 좀 찾아봐 줘. 그리고 나한테 익명으로 보낸 메일도 조사해주고.”
전화기 너머에서 나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요즘 또 한가해진 거야? 그래서 또 나 못살게 굴려고 전화한 거야?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그때 내 말 듣고 대학원 들어갔으면 좋았잖아.”
권해솔이 전화를 건 사람은 임유승이라고 그녀가 대학교 때 알게 된 컴퓨터공학과의 천재였다. 임유승은 하나에 꽂히면 0부터 100까지 꼭 알아야 하는 스타일이라 컴퓨터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런 그가 컴퓨터만큼이나 꽂힌 여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정채영이었다.
임유승은 막 권해솔과 알게 됐을 때 마침 해외에서 돌아온 정채영을 만났다가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 뒤로 맹렬한 고백을 퍼부으며 질리도록 그녀를 쫓아다녔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으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줬을 테지만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정채영이라 그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현재 아직은 친구 사이인 그런 상태였다.
“자료 찾아주면 채영이한테 네 어필 잘해줄게.”
“이보세요. 우리 권해솔 씨가 내 몸값을 제대로 모르나 본데 나한테 일을 맡기려면 적어도 큰 거 한 장은 줘야 해.”
“줄게.”
권해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계좌에 100만 원을 입금했다.
“됐네요. 그 돈 받았다가 또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대신 채영이랑 둘이 밥이나 먹게 자리 좀 만들어줘.”
임유승은 피식 웃으며 말하다가 계좌에 돈이 입금됐다는 문자를 받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야, 농담이잖아. 이렇게 막 덥석덥석 돈을 입금하면 어떡해?”
“앞으로도 널 자주 부려먹으려고 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 그리고 나 피곤해서 이만 끊을게. 내가 부탁한 거 잊지 마!”
“잠깐...!”
권해솔은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침대로 가 털썩 누워버렸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 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잠이 절로 와 그녀는 누운 지 5분도 안 돼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에 깬 권해솔은 비몽사몽 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권해솔, 너 어디야? 오늘 녹음 있는 날인 거 잊은 거 아니지? 빨리 튀어와!”
권해솔은 그 말에 그제야 오늘 일정이 떠올렸다. 수중에 돈이 있어 그런지 해야 할 일마저 깜빡 잊고 있었다.
“나, 나 지금 가는 길이니까 조금만 시간을 끌어줘!”
권해솔은 간단히 양치만 하고는 서둘러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런데 한시가 급한 그때 하필이면 단지 앞에서 불청객 두 명을 만나버렸다. 모자를 푹 눌러쓰며 못 본 척을 해보려 했지만 권설아의 눈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나 아직 미운 거 알아. 하지만 상황이 이미 이렇게 돼버렸잖아. 그러니까 이만 용서해주면 안 돼...?”
권해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뭐라 하려는데 권설아가 예고도 없이 털썩하고 무릎을 꿇어버렸다. 그러고는 울상을 하며 권해솔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한 번만 용서해줘, 언니...”
단지 입구를 오가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하나둘 권해솔에게 뭐라고 했다.
“아가씨,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용서해줘요. 동생이 무릎까지 꿇는데 용서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니까요. 사람들 다 지나는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쯧쯧.”
권해솔은 기가 막혀 웃음이 다 나왔다.
“권설아,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거면 네가 잘못한 게 뭔지도 확실히 얘기해야지. 아니면 내가 말해줄까? 네가 예비 형부 될 사람을 어떻게 꼬드겨 침대까지 끌고 갔는지?”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복잡한 사정에 헛기침을 내뱉으며 금방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기 갈 길을 갔다. 사과 한마디 없이 말이다.
권해솔은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이내 권설아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어디 할 수 있으면 저녁까지 쭉 꿇어보던가.”
그녀는 이 한마디를 남긴 후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오빠, 아무래도 언니는 평생 우리를 용서해주지 않을 건가 봐...”
권설아는 강현수의 품에 와락 안기며 눈물을 보였다.
“괜찮아. 오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너무 속상해하지 마.”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강현수도 권해솔의 마음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몰랐다. 방금만 해도 권해솔의 시선을 단 0.1초도 받지 못했으니까.
강현수는 그 생각에 괜히 마음이 쓸쓸해 나며 입이 썼다.
...
“이제야 오면 어떡해!”
권해솔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발견한 장윤정이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에 다급해진 권해솔이 얼른 뛰어가려는데 때마침 코너에서 회색 후드티에 마스크를 한 남자가 튀어나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윽, 죄송합니다!”
장윤정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얼른 권해솔의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늦지 말라고 경고했어 안 했어? 너 내가...”
권해솔은 장윤정은 보이지도 않는지 시선을 온통 자신과 부딪힌 남자의 뒷모습에만 고정하고 있었다.
“권해솔, 너 지금 사람이 말을 하는데 대체 어딜 그렇게...”
“언니, 저 사람 누구야?”
장윤정은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 돌리지 말고 빨리 따라오기나 해. 너는 사고를 쳐도 꼭 재이가 온 날에 사고를 치냐?”
‘방금 그 사람 누구지? 분명히 익숙한 냄새가 났는데? 그리고 그 뒷모습도 꼭...’
“권해솔!”
장윤정은 안 되겠는지 권해솔의 손을 잡고 직접 위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권해솔은 녹음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남자의 일을 잊을 수 있었다.
“감독님, 괜찮았어요?”
2시간가량의 녹음을 마친 권해솔이 녹음 부스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오랜 시간 녹음을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다 잠겨있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은 것 같네요. 좋았어요.”
허재환 감독은 결과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다행히 늦게 도착한 건 어찌어찌 실력으로 커버가 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