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무술복을 입은 노인이 성큼성큼 걸어왔는데 몸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진태웅은 그제야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바로 이틀 전 아침 운동할 때 마주쳤던 그 노인이었다.
노인이 나타나자마자 원숭이는 큰 인물을 건드렸을까 봐 걱정이 되어 급히 부하들을 말렸다.
하지만 오향은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풀이하러 온 것이니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어디서 굴러온 늙다리야? 참견하지 말고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너까지 함께 처리해버릴 테니까.”
정직한 서광수는 오향은의 말을 듣자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며 엄하게 호통쳤다.
“건방지군. 여기는 너희들이 난동부리릴 수있는 곳이 아니야. 당장 떠나지 않으면 체면을 봐주지 않을 거야.”
이런 경고는 오향은에게 우스울 뿐이었고 손민준은 오히려 더욱 추잡한 말을 내뱉었다.
“이런 늙은이랑 말 섞지 마세요. 죽으려고 작정했으니 함께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에요. 신우빈 씨, 당장 시작해요.”
신우빈 역시 서광수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열 명이나 넘는 사람을 데려왔으니 어쨌든 손해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태도를 보니 손을 쓰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향은의 호감을 사서 하루빨리 손윤서를 품에 안기 위해 신우빈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진태웅부터 잡아요. 이 늙다리가 감히 방해하면 같이 혼내주면 돼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다 책임질게요.”
인명 사고만 나지 않는다면 신우빈은 이 사태를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원숭이도 망설이지 않고 부하들에게 덤비라고 손짓했다.
서광수는 이 상황을 보며 분노가 치밀었다. 몇 년째 아무도 솔빛아파트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진태웅의 앞을 가로막으며 직접 이 사람들을 손보려고 했다.
“어르신, 아무래도 참견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진태웅이 서광수를 향해 말했다. 겨우 두 번 만난 노인이 그를 위해 나선다니 진태웅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광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자네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그리고 자네 그 몸으로 맞서면 매만 맞을 거야.”
때아니게 무시당한 진태웅은 어색해서 코를 만졌다. 자신이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노인의 말에서 그는 다른 의미도 알아챘다. 오늘 이 사람들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놔두면 이 아파트의 평온한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두 부하는 계속 방해받자 화가 치밀어 서로 눈짓하며 서광수를 제압하려 했다.
휙! 그들이 접근하는 순간 서광수는 몸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그중 한 사람의 팔을 잡고 어깨너머로 내던졌다.
동작이 날렵하고 전문적이어서 60세가 넘은 노인 같지 않았다. 특히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위압감은 사람들이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었다.
‘원숭이’는 두 눈을 파르르 떨더니 다른 부하가 움직이려는 것을 보고 즉시 소리쳤다.
“그만해!”
‘원숭이’는 부하들을 말린 후 착잡한 표정으로 서광수를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어르신, 저희가 당장 떠나겠으니 조금 전의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다음에 꼭 찾아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노인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고 솔빛아파트의 특수성을 고려해 보면 이 사람은 전쟁에 참여했었던 분일 가능성이 컸다.
원숭이는 적은 돈 때문에 자신에게 큰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없어 정중하게 사과했다.
서광수는 콧방귀를 뀌며 원숭이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하마터면 신우빈의 함정에 빠질뻔한 원숭이는 그와 인사도 없이 부하들을 데리고 차에 타고 떠났다.
“신우빈 씨, 대체 어떤 놈들을 데려온 거야? 늙은이 하나도 못 이긴다니?”
오향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서광수가 어떤 신분을 가졌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원숭이가 이길 수 없어 겁을 먹고 도망쳤다고 여겼다.
신우빈은 뭔가 알아채고는 오향은을 보며 말했다.
“어머님, 오늘은 일단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진태웅이 평생 여기에 숨어 나오지 않을 수 없잖아요? 처리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어요.”
오향은은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손민준은 주먹을 휘두르며 비아냥거렸다.
“늙다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요?”
손민준은 무술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지만 우람진 몸집으로 약자들을 괴롭히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침을 뱉더니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먹을 휘둘렀다.
서광수는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이 버릇없는 녀석을 혼내주려 했다.
‘쿵!’
서광수가 손을 쓰기도 전에 손민준은 웅얼거리며 배를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서광수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보니 진태웅을 경계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진태웅에게 제대로 걷어차인 셈이다.
“이 자식아! 감히 내 아들을 때리다니! 너 죽을래?”
아들이 맞는 것을 본 오향은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톱을 세우고 진태웅에게 달려들었다.
‘찰싹!’
진태웅이 오향은의 뺨을 후려갈기자 그녀는 빙빙 돌더니 얼굴부터 땅에 처박으며 넘어졌다. 아직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다시 퉁퉁 부어올랐다.
“입 또 함부로 놀리면 다음 생에도 말 못 하게 만들어 버릴 거예요!”
진태웅도 화가 나서 말했다.
“어머님, 어른이라서 참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안 돼요.”
“그리고, 너.”
진태웅이 신우빈을 노려보았다.
“난 이미 네 누나와 이혼했어. 만약 또 윤서 씨 때문에 내 생활을 방해한다면 신씨 가문도 널 지켜줄 수 없을 거야.”
신우빈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물론 그는 진태웅이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을 뿐 믿지 않았지만 면전에서 모욕당하니 체면이 구겨졌고 대꾸하면 맞을까 봐 겁이 났다.
바닥에서 뒹굴던 손민준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이를 악물고 욕을 퍼부었다.
“진태웅, 죽일 놈! 너 딱 기다려. 언젠간 네 가족을 다 죽여버릴 거야!”
“죽고 싶어 환장했네!”
손민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태웅은 눈빛이 차갑게 변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아악!”
이 발길질에 손민준은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냈고 이빨도 몇 개가 부서졌다.
뜻밖에도 서광수도 발차기를 날렸는데 손민준은 즉시 기절하며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어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 그리고 엄마라는 사람이 곁에서 말리기는커녕 방관하다니! 당장 네 아들을 데리고 여기서 꺼져.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네 모자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오향은은 눈이 시뻘겋게 되며 진태웅과 서광수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은 마음조차 생겼다.
신우빈은 이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오향은을 말리며 기절한 손민준을 차에 실었다.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진태웅은 서광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서광수는 그제야 안색이 좋아지며 손을 저었다.
“오늘 누구든지 내가 이 상황을 보면 다 도왔을 거야. 하지만 자네가 이 아파트에 산다면 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잔소리하지 않고 간단하게 경고만 하고 떠났다.
...
강주 병원.
오향은은 얼굴에 아이스 팩을 얹고 있었다. 그 앞의 병상에는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손민준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이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휴대폰을 꺼내 손윤서에게 전화했다.
전화가 연결되자 오향은은 울며 하소연했다.
“딸아, 빨리 병원에 와. 네 동생이 큰일 났어. 진태웅 그 자식이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