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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백수영도 한여름도 저택의 현관조차 들어가지 못한 터라 집안에 있는 가족들은 그들이 왔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은 뒤였다. 강우진은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안서우의 손목을 잡고 저택을 나섰다. 정원을 걸으며 안서우를 위로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나, 속상해 하지 마요. 현우 형이 심했어요. 누나는 방까지 양보해 주려고 했는데 그딴 식으로 말하다니. 되찾은 딸,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에 안서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진아, 내 편 들어주려고 그런 건 알겠는데 앞으론 그러지 마. 어차피 난 친딸도 아니잖아. 내가 지금까지 누렸던 거 전부 가을이 몫이야. 현우 오빠 말도 틀린 거 없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한테 누나는 영원히 서우 누나 한 명뿐이야. 한가을인지 강가을인지 난 절대 인정 못해!” 이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던 두 사람의 귓가에 강가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줌마는 살을 지니고 있어요. 집안 운세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아빠, 300만 원만 주시면 제가 이 업보 지울 수 있어요.” 아줌마를 바라보던 강가을이 진지한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애초에 강가을이 아줌마, 김수영에게 접근한 것도 살을 제거하기 위함, 불청객들이 집을 나섰으니 얼른 용건을 해결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비록 하루아침에 재벌집 딸이 되긴 했지만 대놓고 돈을 달라고 하자니 왠지 어색했는데 마침 이런 일거리가 생겨 다행이다 싶었다. ‘이럼 등록금은 대충 해결할 수 있겠어. 아무리 부녀 사이라도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지.’ 한편, 강현우도 강기태도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가 풍수지리, 사주팔자라니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조합이었기에 그저 대놓고 용돈 달라는 얘기를 하지 못해 이를 핑게를 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강성 그룹의 딸이 돈 300만 원이 없어 이런 수를 쓰다니. 강현우는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300으로 되겠어? 내가 바로 1000 쏴줄게. 부족하면 더 얘기해.” 한 발 늦게 휴대폰을 꺼낸 강기태는 말없이 300 뒤에 0 하나를 추가했다. ‘적어도 10배는 줘야지.’ 하지만 다음 순간, 딸의 연락처도 계좌도 모른다는 걸 인지하곤 왠지 기분이 씁쓸해졌다.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닌데요.” “그래, 그렇겠지.” 강현우는 뭐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김수영 역시 이때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살이 있다면 액막이를 해주십시오.” ... ‘참나, 이것도 나름 직업인데 다들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뭐 이런 취급이 한, 두 번도 아닌지라 다시 설명하려던 그때,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풉, 이런 추잡한 사기 수법으로 돈을 떼먹는 거야? 그것도 겨우 300만 원?” ‘천박하게.’ 가뜩이나 강가을이 마음에 안 드는데다 아까 강현우에게 한 방 먹은 것까지 생각하니 화가 더 치밀었다. 이때 안서우가 강우진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애써 미소 지었다. “가을아, 우진이 얘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네가 이해해.” 하지만 강가을의 시선은 그저 잠깐 두 사람에게 머물었던 것뿐, 그녀는 다시 김수영을 바라보았다. “사주에 부부의 연이 끊어졌네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것 같고... 관상을 보아하니 아들이 한 명 있죠? 아들에게서 온 살로 보여요. 돈 관련된 문제인 것 같은데.” 관상학은 기본만 알고 있는 터라 강가을은 대충 보이는 정보만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김수영은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특히 돈과 관련된 문제라는 말을 들었을 땐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개인의 운세가 직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기운이 강씨 가문과 조금 맞닿아 있는 걸 보니... 강씨 가문의 재물운을 훔쳤군요.” 강가을의 단호한 말투에 김수영의 몸이 움찔했다. ‘뭐지? 어떻게 안 거지? 그냥 찍은 거겠지. 그걸 알 리가 없잖아.’ 한편, 그저 농담으로 넘기려던 강현우, 강기태 부자의 표정도 곧 진지해졌다. 역시 김수영의 반응에서 이상함을 눈치챈 안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아줌마가 우리 집안 재물을 훔쳤다는 말이야?” 안서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지. 아줌마가 이 집에서 일한 지 벌써 10년째야. 그럴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안서우의 말에 김수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가씨, 그런 말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제가 주인집 물건을 훔치다뇨. 제가 이 집에서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리곤 강현우를 향해 애원했다. “우진 도련님, 절 믿어주세요. 저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가뜩이나 강가을이 싫은 데다 김수영은 어렸을 때부터 강우진을 자기 자식처럼 키워준 존재, 그런 이가 눈물까지 글썽이니 강우진은 역시나 버럭했다. “너 뭐야? 아줌마가 돈을 훔쳐? 오늘에서야 우리 집에 들어온 주제에 네가 뭘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깟 용돈 300만 원 때문에 멀쩡한 사람을 궁지에 빠트려?” 오늘 처음 본 강가을보다 10년을 함께한 김수영에게 정이 더 든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보면 볼 수록 마음에 안 든다니까.’ 안서우도 거들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겠지. 혹시 아줌마가 너한테 뭐 실수한 거야?” 개인적인 원한을 이런 식으로 푸는 건 아니냐는 말이었다. 이에 김수영의 머리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가씨... 아까 사모님이 절 아가씨 친모라고 오해한 게 싫으셨던 거죠.” 김수영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 같은 미천한 사람을 아가씨 친모라고 했으니 화가 나실 만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모함은 너무 억울합니다. 이 나이에 이 집에서 쫓겨나면 전 앞으로 뭘 먹고 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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