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장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6월, 별장 문을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캐리어가 한가을을 먼저 맞이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중년 여인이 현관에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흰 피부, 정교한 이목구비를 살펴보던 중년 여자의 얼굴에 순간 질투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곧 감출 수 없는 혐오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짐은 내가 다 싸뒀어.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친부모한테로 돌아가라고!” 한가을의 시선은 바닥에 나뒹구는 캐리어가 아닌 지난 17년간 어머니라고 불렀던 백수영에게로 향했다. 소란에 한성태와 한여름, 한기현 남매도 문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한가을의 발언저리에 떨어진 캐리어를 먼저 발견한 한성태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우리 딸로 살았던 아이야.” “하, 그렇지 않아도 저딴 걸 딸이라고 키운 세월이 아까워요!” 백수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한가을을 노려보았다. “해성시 홍보대사를 여름이한테 양보하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끝내 동생 걸 빼앗았잖아요? 아주 내 말은 듣지도 않지! 최종 명단에 오른 사람을 미리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한여름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곧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그러지 마세요. 해성시 홍보대사 자리면 워낙 대단하니까... 욕심내는 언니 마음도 이해가 가요. 선발되지 못한 건 어디까지나 제가 부족한 탓이죠...” “네가 쟤보다 못한 게 뭐야. 한씨 가문 딸이라는 타이틀만 아니면 쟤도 아무것도 아니야.” 백수영이 딸을 위로했다. 한편, 한가을은 두 모녀의 생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봐왔던 연극, 너무 여러 번 겪어서인지 속상하지 않았고 억울하다는 감정보다는 웃기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양보? 당신 딸 구하려다 내가 죽을 뻔한 건 생각도 안 나나 보지?’ 3일 전, 한가을은 한여름을 구하려다 차에 치여 약 20m 가량을 튕겨나갔었다. 주위의 구경꾼들은 그녀가 즉사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달려온 백수영과 그 가족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죽어가는 한가을이 아닌 사고에 겁을 먹고 울고 있는 한여름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더 끔찍했던 건 백수영과 한성태의 대화였다. “차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으니 무조건 죽었겠죠?” “차라리 잘 됐어. 쟤가 죽으면 여름이 팔자에 있다던 대흉을 저 계집애가 대신 가져간 꼴이 되니까. 그 동안 우리 집에서 먹고 잔 값은 치른 거지...” 이렇게 되기 전에도 한가을은 본인이 한씨 가문이 아끼는 딸의 액막이용으로 입양한 도구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왜 한여름이 아플 때마다 그녀가 직접 병간호를 해야 했는지, 그녀의 보살핌으로 한여름이 병을 털고 일어난 뒤엔 왜 그녀가 앓아누워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사부의 가르침 덕에 자신과 한여름의 사주팔자가 음양술의 건곤결합에 속함을 알게 되었다. 최고의 합을 의미하는 건곤결합, 한씨 가문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녀를 한여름 곁에 두었던 건 그녀의 기운이 한여름에게 닥치는 액을 막아주길 바라서였다. 그 부작용으로 액받이인 그녀의 운명은 점점 피폐해져 갈 테지만 그건 그쪽 가족들의 관심 밖이었다. 한가을이 미리 대비해 두지 않았다면 기운이 다 떨어져 정말 3일 전 그 사고에서 비참하게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사고 덕분에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말씀 끝나셨어요? 그럼 저 가도 되죠?”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던 모습은 그녀의 마지막 기대마저 져버렸고 없던 정도 더 떨어질 판이라 한가을은 미련없이 돌아섰다. “네 엄마 원망하지 마라. 이번 일은 네가 잘못한 게 맞아.” 그녀의 뒤를 따라온 한성태는 여느 때처럼 엄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제 친부모도 찾았으니 그분들에게 돌아가는 게 맞아.” “언니, 엄마 탓하지 마. 괜히 나 때문에 화 내시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봉투를 건네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여기 20만 원이야. 언니 부모님 시골 분이시고 집안 사정도 별로 안 좋다면서. 그런 곳은 인터넷도 잘 안 될 테니까 현금으로 준비했어.” 뒤편에서 바라보던 백수영이 코웃음을 쳤다. “그 돈 받고 어디 가서 우리가 매정하게 널 내쳤니 어쨌니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 그 돈이면 시골에선 1년은 먹고 살 수 있지 않아? 그나마 우리니까 이 정도로 해주는 거야.” 그리고 뭔가 생각난 건지 실실대기 시작했다. “너 거기 가면 우리 다시 볼일 없겠지? 그런 시골엔 장가 못간 노총각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그중에서 대충 골라 시집이나 가. 어차피 네 성적에 대학은 꿈도 못 꿀 테니까.” 자비를 베푸는 척 그녀를 비웃고 있는 모습에도 한가을은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엄마도 많이 늙었네요. 그 이마에 주름, 그 동안 쌓은 업이 많다는 의미기도 해요. 제 걱정보단 보톡스나 한 대 맞으세요.” 잠깐 멈칫하던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뭐, 어차피 소용 없겠지만.” 너무나 진지한 표정에 기분이 확 나빠진 백수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네까짓 게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그리고 총총 걸음으로 달려온 그녀가 한가을의 얼굴을 향해 따귀를 때리려던 찰나,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한가을은 여유롭게 그녀의 공격을 회피했다. “네가 감히... 피해?” 백수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한여름이 한겨울을 부축하는 척하며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언니, 엄마 화 나게 만들지 마. 진심으로 사과드리면 엄마도 받아주실 거야.” 부축하는 척 더 피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움직임을 묶어둘 셈인 것 같아 한여름의 손을 뿌리치려던 그때, 시선의 끝자락에 한여름의 손목에 걸린 옥팔찌가 들어왔다. 가녀린 손목을 덥석 잡은 한가을이 따졌다. “이 팔찌가 왜 너한테 있어?” 솔직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특별히 하고 나온 것인데 이제야 봐주니 기뻤지만 겉으로는 겁 먹은 척, 아픈 척 얼굴을 찡그리는 한여름이었다. “윽... 아파...” 그 모습에 백수영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한겨울의 손을 뿌리치곤 소리쳤다. “뭐? 저게 네 거라고 말하려고? 저건 어머님이 한씨 가문 딸에게 물려주시기로 한 팔찌야.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여름이가 가지는 게 맞지 않니?” 이를 꽉 문 한가을은 짐을 챙긴 캐리어를 툭 떨구곤 한태성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이 집안에서 받은 물건 전부 다 버리고 갈 수 있으니 저 팔찌만 제게 주세요.” 이 집안에서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사람,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다. 눈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 걱정뿐이었던 할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랬기에 이 팔찌는 한겨울에게 그저 그런 장신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한성태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입양된 아이긴 하지만 그동안 널 친딸로 생각해 왔다. 우리 집안이 양아치도 아니고 딸 떠나 보내는 마당에 짐까지 빼앗을 생각은 없어. 널 낳은 부모들은 집안 사정도 안 좋다니 챙길 건 챙기도록 해.” 그녀를 챙겨주는 듯한 말투였지만 결국엔 팔찌는 줄 수 없다는 것이 말의 요지였다. 한여름 역시 그 특유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도 이 팔찌 가지고 싶은 거지? 하지만 이건 할머니 물건이잖아... 음, 그럼 내가 돈을 좀 더 챙겨줄게. 200만 원이면 될까? 아니면 500?” ‘네까짓 게 팔찌를 챙겨봤자 팔기밖에 더하겠어?’ 하지만 한가을의 날카로운 시선에 겁을 먹은 한여름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백수영은 질세라 딸을 등 뒤로 숨기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너 지금 그 눈빛 뭐야? 여름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이건 우리 한씨 집안 대대로 물려져 내려오는 물건이야. 다른 것도 아니고 네가 뭔데 이걸 챙겨! 그 동안 네가 이 집에서 먹고 자고 한 비용을 청구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용돈까지 안겨줬으면 감지덕지 할 것이지. 뻔뻔하긴.” 그리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한기현도 거들었다. 한성태와 놀랍도록 닮은 얼굴에는 불만과 실망이 가득했다. “저 팔찌는 처음부터 여름이 거였어. 너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애써 분노를 누르기 위해 한가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때 한기현이 말을 이어갔다. “고분고분 여름이한테 홍보대사 자리 넘기면... 내가 엄마, 아빠 설득해 보고.”
Previous Chapter
1/400Next Chapter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