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아니야.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유채린을 대할 때면 유도경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워졌다.
“스님 말이 꼭 맞는다는 법도 없잖아. 잘못 보셨을 수도 있어.”
“경진시에서 제일 유명한 스님인데 잘못 보실 리가 없잖아.”
유채린이 듣는 사람이 마음을 졸이게 울먹였다.
“오빠, 어떡해. 나 정말 너무 무서워.”
“채린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있잖아.”
유도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았다. 유채린을 대할 때면 부드럽고 인내심 가득한 유도경을 보며 유하연이 실망을 감추려고 눈꺼풀을 축 늘어트렸다.
사실 유도경도 유하연을 이렇게 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이렇게 좋은 오빠를 둔 것에 감사했고 무슨 사고를 치든 뒤처리를 해주는 오빠가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유하연은 유도경의 부드러움이 그녀를 향한 게 아닌 동생을 향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3년간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무뎌질 줄 알았지만 유하연은 매번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유하연은 깊이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고 솟구쳐 올라온 감정을 애써 무시했다.
유도경이 다독이자 유채린의 정서도 점점 차분해졌다.
“너도 아이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유도경이 유채린과 약속했다.
“산부인과를 제일 잘한다는 배 선생님을 모셔서 너의 아이를 케어하게 할 거야.”
“정말?”
유채린은 너무 기쁜 나머지 톤이 올라갔다. 이에 유하연의 눈빛도 유도경에게로 향했다. 산부인과의 신으로 알려진 배호진은 업계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의술이 뛰어났지만 나이가 많아 2년 전에 은퇴한 후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쉽게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유채린이 흥분을 여과 없이 드러내자 유도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배 선생님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걱정할 필요 없어.”
“알았어.”
유채린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오빠. 역시 오빠밖에 없다니까.”
유도경이 꿀 떨어지게 말했다.
“내가 너 말고 잘해줄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그래?”
“그 있잖아...”
생각한 대로 내뱉은 유채린이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말을 돌렸다.
“아무튼 앞으로 쭉 잘해줘야 해.”
유도경이 흔쾌히 수락했다. 통화가 끝나자 유도경의 시선이 다시 유하연에게로 향했고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로 입을 열었다.
“배 선생님 오면 너도 정밀 검사받아.”
“싫어요.”
유하연의 눈꺼풀이 마구 뛰었다. 배호진에게 검사를 받으면 더는 감출 수 없다는 생각에 단칼에 거절했지만 오히려 유도경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배 선생님은 유채린을 위해 찾은 사람이잖아요.”
유하연이 시선을 돌리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
“내가 뭐라고 감히 유씨 가문의 진짜 아가씨와 비겨요.”
이 말에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오른 유도경이 유하연의 얼굴을 잡고 억지로 눈을 마주했다.
“며칠 뒤면 올 거야.”
유도경이 이렇게 말하며 옆에 떨어진 외투를 줍자 강아람은 유도경이 혹시나 유하연을 데려갈까 봐 그러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앞으로 다가섰다.
“유 대표님, 하연이 몸 상태가 말이 아닌데 병원에서 한 주간 쉬게 놔두는 게 어떨까요?”
“산부인과가 여자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강아람이 이렇게 말하며 유하연과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 다 유도경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너무나 강압적인 남자라 그가 결정한 일은 아무도 되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 유도경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유하연도 몰래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유도경이 떠나고 나서야 강아람은 침대에 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정말 너무 사이코패스다.”
옷을 제대로 입은 유하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강아람 곁으로 다가갔다. 몸 상태가 어떤지 물으려는데 김희영이 마침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유채린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온 뒤 김희영이 유하연에게 전화하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관심은 여전했지만 신경은 온통 유채린에게로 향해 있었다. 이제 김희영의 전화는 유채린과 관계된 일이 많았기에 김희영의 전화가 뜰 때마다 불효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하연은 마음이 갑갑했다.
김희영이 바로 용건을 말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연아, 지금 당장 집으로 들어와.”
유하연은 유씨 저택으로 가기 싫어 핑계를 찾으려 했다. 돌아갈 때마다 온몸의 가죽이 한층 벗겨진 것처럼 너무 피곤했는데 지금은 몸까지 좋지 않으니 최대한 멀리 피하고 싶었지만 김희영이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엄숙한 말투에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유하연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억지로 들어오라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겠어.”
유씨 가문에 관한 일만 생각하면 강아람은 머리가 지끈거려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유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들어오라니까 들어가야지.”
강아람은 별수 없이 유하연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에서 잠시 나갈 수 있게 해줬다. 그렇게 약 반 시간이 지나 유하연이 부랴부랴 유씨 저택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도 김희영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여러 번 문자를 보내 재촉했다.
유하연은 급한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김희영을 보고 나서야 유하연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쁜 숨을 돌렸다.
“엄마,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거예요?”
유하연은 선뜻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아 옆에 서서는 이렇게 물었다. 이제 그녀는 유씨 가문의 손님이나 다름없었기에 올 때마다 어딘가 궁색해 보였다. 예전 같으면 김희영도 유하연에게 앉으라고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런 말도 없었다. 김희영은 평소 관리를 잘해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유하연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수심 가득한 얼굴로 유채린을 바라봤다.
“아이가 위태로운 게 하연이 때문도 있다고?”
김희영이 캐물었다.
“이제 하연이도 돌아왔으니 어떻게 된 건지 얼른 말해 봐.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해야지.”
유하연은 이제 유채린과 관련된 일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지만 아이 얘기가 나오자 유채린이 무슨 꿍꿍이를 펼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엄마, 전에 절에 갔을 때 스님이 자식 복이 옅다고 한 거 기억하죠?”
유채린이 유하연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이렇게 말하자 김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채린의 손을 잡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행동에서 김희영이 유채린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다 엄마가 못나서 그래. 다 내 잘못이야. 우리 채린이는 축복을 받고 자식과 손주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평생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엄마.”
유채린이 짜증스럽게 김희영을 말을 잘라버리더니 씩씩거리며 유하연을 가리켰다.
“엄마랑은 아무 관계 없어요. 내가 알아봤는데 유하연이 저지른 짓이더라고요.”
“뭐라고?”
김희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언성이 높아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김희영이 유채린을 보호하며 유하연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하연은 너무 씁쓸해 눈시울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무의식적인 반응은 속일 수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유하연이 아무 일 없는 척 침착하게 말했지만 솟구쳐 올라오는 서러움에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채린이 유하연을 힘껏 밀치자 유하연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다 너 때문이야.”
유채린이 오만한 표정으로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풍수지리를 잘 아는 역학 박사를 만나고 왔는데 네가 내 운을 빨아먹어서 그렇대. 네가 내 운을 뺏은 거라고.”
“20년간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을 누렸으니 네가 있는 한 난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대. 남편도 잃고 아이도 잃고 혼자 늙어 죽을 거라고.”
“정말이야? 어떻게 이럴 수가.”
김희영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채린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엄마, 나를 위해서라도 유하연을 당장 경진시에서 내쫓아버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