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유하연은 유채린이 그녀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원인이 20년간 신분을 뺏어간 것뿐만 아니라 심윤재 때문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김희영 앞에서 유채린과 입씨름하기 싫었던 유하연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희영이 얼른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 했다.
“헛소리는. 하연이 열나서 자느라 못 받은 거야.”
그러더니 유하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약은 먹었어?”
“먹었어요.”
“그래, 다행이다.”
김희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더니 유하연을 끌어다 앉히며 잡지를 건넸다.
“하연아, 한번 봐봐. 올해 신상들인데 채린이 도와서 골라주면서 네 것도 봐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유하연은 김희영이 입을 열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데 드레스를 고르라는 말에서 그 의도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연아, 너도 생각해 봐. 채린이 곧 결혼하는데 너도 계속 솔로로 남을 수는 없잖아.”
김희영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너희 아버지가 협력한 회사가 있는데 아들 나이가 너보다 두 살 많고 금방 외국에서 들어왔다고 들었어. 나도 만나봤는데 애가 곱상하니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 언제 시간 되면 한번 만나볼래?”
순간 유하연은 온몸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억지로 입을 열었다.
“엄마, 난 아직 연애할 생각이 없어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채린이 어두운 표정으로 잡지를 바닥에 던졌다.
“연애할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미련을 못 버린 거야?”
유채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 곧 윤재 씨랑 결혼하는데 설마 아직도 못 잊은 거 아니지?”
유하연은 목구멍이 막혔지만 솟구쳐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곧 결혼인데 자신감을 가져.”
이 말에 잠시 넋을 잃었던 유채린이 따귀를 때리려는 듯 손을 쳐들자 유하연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떠보니 유도경이 유채린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유채린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오빠.”
유도경이 유하연을 힐끔 쳐다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덤덤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사과해.”
유도경이 입력하자마자 유하연이 바로 출력했다.
“미안해.”
유하연은 뭐가 미안한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김희영이 유채린을 달래는 걸 보고 유하연은 마음이 씁쓸했지만 심호흡하며 꾹꾹 눌러 담았다.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씻고 고개를 드는데 거울에 웅장한 체격을 가진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쳤다. 차가운 눈빛은 왠지 모른 압박감이 느껴졌고 단 몇 걸음 만에 유하연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던 유하연이 최대한 몸을 벽에 바짝 붙이자 유도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 주 금요일 밤에 어디 있었어?”
따져 묻는 듯한 말투에 유하연이 눈을 질끈 감더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성진호텔에 있었어요.”
“만난 사람은?”
“심윤재요.”
“세민 건설 사장님과 계약서를 토론하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유하연이 손바닥을 꼬집으며 겨우 이렇게 말하더니 유도경을 올려다봤다.
“그냥 우연히 마주쳤을 뿐 대화는 나누지 않았어요.”
사실 이런 상황에서 심윤재를 만난다 해도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몰랐다. 유도경이 유하연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유하연도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운전기사나 보디가드쯤일지 모르지만 마음먹고 찾으면 더 많을 것이다.
유하연은 가끔 자신이 사각지대는 없는 밀폐된 공간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든 유도경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숨 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더 절망적인 건 언제까지 이런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눈빛이 조금 밝아진 유도경이 손바닥으로 유하연의 볼을 어루만지자 차가운 온도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 그래야지.”
어찌나 가깝게 섰는지 유하연은 유도경 몸에서 나는 옅은 연초 냄새를 맡고 속이 뒤틀려 반사적으로 유도경을 밀어내고는 변기에 대고 속에 든 것들을 전부 털어냈다.
유하연은 오늘 먹은 게 별로 없었기에 토해낸 거라곤 위액밖에 없었다. 메슥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한 유하연이 몸을 일으키다 유도경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고는 마음이 철렁했다.
칼날처럼 매서운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져 유하연은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유도경이 유유히 입을 열었다.
“임신했어?”
유하연이 손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피임약 꼭꼭 챙겨 먹고 있는데 그럴 리가요... 먹은 게 없어서 위가 불편할 뿐이에요.”
유도경이 그런 유하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더는 묻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입을 헹군 유하연이 거실로 돌아왔을 때 김희영도 유채린을 거의 다 달랜 상태였기에 유채린은 다시 나타난 유하연을 보고도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김희영이 유하연을 부르더니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일단 마음에 드는 사람 있는지 봐봐.”
그러더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연애는 아니더라도 일단 만나보는 건 어때?”
유하연이 어쩔 수 없이 사진을 받아 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김희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시간 내서 병원 한번 다녀와 봐. 의사가 뭐라는지 들어봐야지.”
유하연의 손이 멈칫했다. 전에 의사가 유하연은 몸에 한기가 많고 자궁벽이 두꺼운 데다 난소의 발육도 좋지 않아 임신이 어려운 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몸이 나쁘면 조심해야지.”
김영희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마침 너희 오빠가 외국에서 최상급 제비집을 가져왔는데 조금 가져가.”
유채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엄마, 뭘 그렇게까지 해. 잘해줬는데도 몸이 그 모양이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도 곧 윤재 씨랑 결혼하는데 제비집 먹으면서 몸조리 좀 해야지.”
유채린과 유하연이 있으면 김희영은 늘 유채린을 향해 있었기에 얼른 이렇게 다독였다.
“그래. 너도 먹고 싶으면 내가 너희 오빠한테 조금 더 사 오라고 할게.”
유하연은 화목한 두 사람을 보며 눈시울이 빨개졌다. 이 집에서 유하연은 철저한 외부인이 되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인사까지 한 유하연은 결국 김희영이 말한 제비집을 남겨둔 채 유씨 가문에서 나와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몸이 좋지 않았고 입맛도 별로 없는 데다 자꾸만 속이 메슥거려 참아내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설마 정말 임신인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유채린에 의해 겨울날 차가운 수영장에 빠지는 바람에 자궁에 한기가 가득 들어차게 되었고 의사도 임신할 확률이 10%도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유하연은 최대한 끔찍한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는데 정말 임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