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운전기사가 유하연에게 문을 열어주더니 유하연을 태우고 유씨 저택을 빠져나와 예정된 스케줄에 맞춰 유도경이 있는 회사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은 유하연은 손에 땀이 차올라 서류를 꽉 움켜쥐고는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사실 아까 김희영을 찾아갈 때 이미 강아람과 합을 맞춘 상태였다. 만약 김희영이 운전기사를 붙인다면 강아람에게 문자를 보내고 강아람이 탈출할 방법을 생각하기로 했지만 무조건 성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시간이 1분 1초 흘러가고 유도경이 있는 회사와 점점 가까워지자 유하연의 마음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도로는 마치 괴물처럼 당장이라도 유하연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그때 운전기사가 소리를 지르자 유하연이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질주해 왔고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두 차는 격렬하게 부딪히고 말았다. 터져 나온 에어백에 맞은 유하연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지만 그들을 향해 달려온 차가 강아람의 차라는 걸 알아보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얼른 차에서 내렸다. 맞은편 차량에서 내린 운전기사는 다름 아닌 강아람 집에서 일하는 운전기사였다.
유하연은 차에서 내려 강하람의 운전기사와 싸우는 척하다가 강아람의 운전기사가 유하연을 억지로 타고 온 차에 밀어 넣었다. 유하연은 못 이기는 척 발버둥 치더니 잽싸게 상대편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강아람의 운전기사는 상대편 차를 들이받을 때 운전석 쪽으로 들이받았기에 몸을 다친 유하연의 운전기사는 조금 늦게 차에서 내렸고 얼른 막아서려는데 유하연이 이미 상대편 차에 오른 뒤였기에 까만 세단이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차는 그 길로 달려 제시간에 유하연을 병원에 데려다줬다. 병원 앞에서 결과지를 들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강아람은 부랴부랴 달려온 유하연을 보고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아이고, 조상님. 오긴 왔네. 나 이러다가 너 때문에 심장병 걸리겠어.”
“고마워. 아람아.”
유하연이 강아람을 꼭 끌어안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지금 이 처지에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강아람밖에 없었다.
강아람도 코끝이 찡했지만 일부러 웃으며 유하연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통쾌하게 웃었다.
“됐어. 시간 없으니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검사부터 하자.”
유하연이 강아람을 놓아주고는 함께 산부인과로 향했다.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던 유하연의 시야에 익숙한 그림자가 들어와 잠깐 넋을 잃었다가 다시 확인하려는데 그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연아, 여기.”
강아람이 키오스크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예약하면 돼. 왜 멍하니 서 있어?”
강아람의 부름에 유하연은 일단 복잡한 생각을 접어두고 난감한 표정으로 메고 온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병원 진료 카드를 꺼냈다.
‘잘못 본 거겠지.’
하지만 유하연이 모르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하연이 그 그림자를 알아봤을 때 그 그림자의 주인공인 심윤재도 유하연을 알아봤지만 그저 무의식적으로 피했을 뿐이었다. 심윤재는 유하연과 마주쳐도 만날 엄두가 나지 않을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하연이가 왜 산부인과에 온 거지?’
한참 망설이던 심윤재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유하연이 있던 자리로 향했지만 유하연은 이미 강아람과 함께 수술 전 검사를 받으러 온 후였다. 검사 항목이 많고 복잡했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어딜 가나 줄을 서야만 했다. 강아람이 미리 손을 써놓았다 해도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했기에 두 사람은 조용한 구석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배낭을 봤는데 발육이 그나마 좋은 편이었어.”
기다리는 동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강아람이 초음파 검사 결과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도 괜찮다는 건 아이가 정말 건강하다는 거야.”
유하연이 빨간 입술을 앙다물더니 시선을 돌렸다. 처음부터 유하연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질까 봐 검사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채 자라나지 못한 배태일뿐이잖아.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유하연은 최대한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강아람은 고집스러운 유하연의 얼굴을 보며 언어를 정리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연아, 정말 아이를 지울 준비는 되어있는 거야?”
선택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유하연은 차라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유하연이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강아람은 말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를 지우면 영원히 임신할 수 없을지도 몰라.”
임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이제 더는 임신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변한다는 의미였기에 강아람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너 하혈해서 병원에 실려 왔을 때도 몸에 준 타격이 너무 커서 좋은 약을 많이 썼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말이야.”
“원래도 임신하기 힘든 몸인데 이 아이가 어쩌면 네가 이번 생에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아이일지도 몰라.”
유하연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유하연은 보기보다 그렇게 꿋꿋하지도, 매정하지도 못했다. 유하연과 심윤재는 아이를 좋아했기에 약혼이 유효했을 때 같이 보육원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유하연은 이제 심윤재도 잃고 유일한 아이마저 잃게 된다.
슬픔에 잠긴 유하연이 입을 열었다.
“아람아, 무슨 말인지 알아. 그래도 이 아이를 남길 수는 없어. 이번 생엔 영 인연이 아닌가 보지.”
강아람이 그런 유하연을 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하연아, 사실 계속 묻고 싶었는데 물을 기회가 없었어. 이 아이 유도경 핏줄이야? 아이를 낳아서 유도경에게 남겨주고 떠나는 건...”
“아빠가 유도경인 건 맞지만 그건 안돼.”
유하연은 강아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며 거절했다. 그렇게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유하연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윤재랑 도망가려다 들킨 날 유도경이 날 강박했어. 나랑 심윤재는 이제 정말 끝이야.”
“그 뒤로 유도경은 나를 빛을 보지 못하는 노리개로 만들어버렸지. 도망치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유도경의 집착은 심해졌어.”
유하연은 그때 당했던 수모와 굴욕을 털어놓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말하고 나니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대화에 집중한 두 사람은 키가 크고 체격이 웅장한 누군가가 문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대화가 절정에 치닿자 굉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야.”
화들짝 놀란 유하연과 강아람이 동시에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우뚝 서 있는 심윤재를 보고 넋을 잃었다.
“심윤재?”
눈이 휘둥그레진 유하연이 무의식적으로 결과지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설마 아까 나눈 대화를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이성을 잃은 심윤재가 유하연에게 달려들어 깡마른 어깨를 꽉 부여잡더니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 왜 말해주지 않은 거야. 내가 알았다면 절대 이 손 놓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우린...”
“심윤재.”
유하연이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하는 심윤재의 이름을 부르며 피하려는데 뒤에 서 있던 강아람이 소리를 질렀다.
“유 대표님.”
깜짝 놀란 유하연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유도경이 심윤재가 잡고 있는 유하연의 얼굴로 향하더니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