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매끄럽고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반투명 스타킹이 찰싹 달라붙어 우아한 곡선을 더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흘낏 쳐다보던 이천후의 시선이 여자의 아름다운 다리에 머물렀고,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키가 크고 늘씬한 이 절세미인이 이천후를 쳐다보더니, 그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금색실이 우아하게 감고 도는 흰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여성스럽고 섹시하면서도 고귀한 분위기가 풍겨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두 눈은 호수처럼 황홀하고 기품이 넘쳤다. “이천후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한아연입니다. 할아버님과 통화하셨죠?”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이천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아연? 이천후는 살짝 놀랐다. 이 여자가 한씨 가문의 큰 딸이구나! 절세미인이네! “안녕하십니까, 이천후입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선생님, 우리 용진 그룹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한아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한 회장님께 들었습니다.” 이천후는 앞에 보이는 낡은 아파트 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들어갔다 나오겠습니다.” 기다려? 한아연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한씨 가문의 한아연이 직접 왔는데, 누가 감히 나를 기다리라고 해? 하지만, 이천후는 할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이천후는 물건을 짊어지고 집으로 갔다. 이 낡은 아파트는 그와 임은설의 신혼집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임은설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2년 전 이 집에서 이사해 나갔다. 이 낡은 아파트는 결국 그의 차지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온 이천후는 들고 온 짐을 풀었다. 딸 아이를 위해 만든 알록달록한 옷을 보니 다시 심장이 미어질 듯 아파왔다. 옷을 정리하는 이천후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가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슬퍼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유미옥 모자가 열려있던 문을 부술 듯이 밀치며 뛰어들어 왔다. “이 서방, 이 서방...” 유미옥이 이천후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천후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여기 있었네.” 임수명이 헤헤 웃으며, 손에 든 글씨를 가리켰다. “이거 당신이 쓴 거 맞아?” 춘지언운? 글씨를 흘낏 본 이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옥 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나누었다. 다시 이천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보는 듯 했다. “글씨가 참 좋아. 당신 이혼한데다 일자리도 없잖아. 이렇게 불쌍한 처지가 됐으니, 내가 착한 맘으로 일자리 하나 줄까 하는데... 매일 나한테 글씨를 써주면 내가 매월 40만원씩 주지. 어때?” 임수명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천후의 입가에 비웃음이 흘렀다. 내 글씨는 부르는게 값인데, 매월 40만원? “별로야. 그만 가봐.” 이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뭐?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임수명이 화를 냈다. 유미옥이 급히 그를 저지하며, 이천후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가 가득했다. “이 서방, 어쨌든 자네는 내 사위 아닌가? 글씨 몇 개 쓰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우리 수명이가 정중하게 부탁하는데, 좀 써 주지?” “사위요? 저는 임은설과 이미 이혼했어요. 이제 당신들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이천후가 냉랭하게 말했다. 유미옥의 얼굴색이 즉시 변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그새 장모도 몰라 봐? 네가 사람이냐? 네가 사람이면 지금 글씨를 써 줘야지!” “꺼져!” 이천후의 눈에서 노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쭈! 죽고 싶지?” 임수명이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들어 이천후를 향해 내리쳤다. 이천후가 잽싸게 몸을 돌려 피하는 바람에 임수명의 몸이 휘청하며 쓰러질뻔 했다. 이때, 유미옥은 잽싸게 옷더미 쪽으로 달려갔다. “이 배은망덕한 놈. 오늘 글자 천 개를 안 써주면 내가 이 옷들 전부 불살라버릴거야.” 임수명도 즉시 라이터를 꺼내 들고 달려가서 곰인형을 집어들었다. 그는 이천후 앞에 라이터를 흔들어 대며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쓸래, 안 쓸래?” 그는 손에 든 라이터에 불을 켜더니, 천천히 곰인형 가까이로 라이터 불을 가져갔다. 라이터 불이 즉시 곰인형으로 옮겨 붙자 순식간에 방 안 가득 타는 냄새가 퍼졌다. “개XX” 이천후는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임수명의 얼굴을 쳤다. 짝! 뺨을 맞았을 뿐인데, 임수명의 온몸은 벽 쪽으로 날아가더니, 머리를 부딪히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에서 끈적한 피가 흘렀다. 이천후는 곰인형 쪽으로 달려가 불을 껐지만, 곰인형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화가 잔뜩 난 이천후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임수명의 멱살을 잡고 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십여차례 뺨을 맞은 임수명의 얼굴은 울긋불긋 멍이들고 퉁퉁 부어 올랐으며, 이빨 두 개도 부러져 피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네가 감히 우리 수명이를 때려? 어디 나도 때려봐라, 나도 때려 봐.” 소리 지르던 유미옥은 하이힐을 벗어들더니, 날카로운 구두 굽으로 이천후의 눈을 찍으려 했다. 이천후는 유미옥의 손을 잡아채 가볍게 밀었다. 유미옥은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뒹굴었다. “꺼져!” 이천후가 소리쳤다. 분노를 뿜어내는 이천후의 벌건 눈은 유미옥의 눈에 악마같아 보였다. “표범 형님 올라오세요. 이 놈이 사람을 칩니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임수명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원래 직업도 없이 시간을 허송세월하던 한량이었는데, 돈이 생긴 후에는 임사장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며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커다란 문신을 자랑하는 거구의 남자가 십여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뛰어 들어왔다. 험상궂게 생긴 그들은 모두 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 놈입니다. 이 놈, 죽여버려요.” 임수명이 이천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무기를 든 십여명의 남자가 금새 이천후를 포위했다. “흥!” 이천후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목에 걸린 펜던트를 잡아 뜯더니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 쳤다. 펜던트 표면에 새겨져 있던 뱀과 참새의 모양에 금이 가더니, 용 한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 펜던트! 드래곤 펜던트를 바라보는 이천후의 눈빛이 더할 수없이 부드러웠다. 친구! 너를 3년이나 묶어 두다니, 미안했다... 이제! 뱀과 참새는 사라지고,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이용주가 드디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