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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교훈

실망과 고통에 잠식되어 몸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소은정은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법원으로 향했다. 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그 사이 박수혁은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지만 전부 무시해 버렸다. 소은정은 창백한 얼굴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1시간쯤 지났을까? 박수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법원 앞에 나타났다. 소은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래, 이번 달에 유난히 많이 부탁했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나도 충분히 보상은 해줬잖아.” “이혼하자...”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 솔직히 지금 그녀의 기분으로는 더 이상 박수혁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박수혁은 소은정이 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는지 이유조차 제대로 모르는 눈치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입씨름을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 소은정은 잘생긴 박수혁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만한 얼굴, 하지만 이 얼굴로 한 번도 그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소은정은 행여나 박수혁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조심,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런데 이혼을 결정하고 나니 굳이 왜 그렇게 비굴하게 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더 이상 박수혁이 두렵지 않았다. 소은정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박수혁은 짜증이 치밀었다. 차라리 돈을 더 요구했다면 얼마든지 들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 건방진 태도는 뭐지? 이 정도 돈이라면 굳이 소은정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자신의 피를 내놓을 사람이 수두룩할 텐데 말이다. “소은정, 후회하지 마!” “후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바로 당신이랑 결혼한 거야.” 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 걸까? 박수혁과 사는 동안 그녀의 몸도 마음도 전부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결국 박수혁도 소은정의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별말 없이 법원으로 향했다. 형식적인 접수 절차가 끝나고 단 몇 분 만에 3년간 이어진 결혼생활이 끝나버렸다. 미리 각오한 일임에도 이혼조정 서류를 받아든 순간 새삼스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법원에서 나온 박수혁은 더 이상 그녀 따위는 제대로 쳐다볼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병원으로 가자.” 역시, 이 남자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다.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박수혁, 그 여자가 죽든 말든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지금부터 내 피 한 방울도 주지 않을 거야.” 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쏘아붙였다. “민영이가 지금 얼마나 위독한 상황인데. 이런 식으로 저주를 해? 애초에 너랑 결혼하는 조건이 그거였잖아.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피를 내놓는 거 말이야.” 박수혁의 말이 비수처럼 소은정의 마음에 꽂혔다. 그렇다. 처음부터 보잘것없는 그녀가 박수혁과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희귀한 혈액형 덕분이었다. 서민영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헌혈을 하겠다고 분명 약속했었지. 소은정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눈앞의 남자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3년 동안 질리도록 봐왔던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박수혁에게 그녀란 존재는 살아있는 혈액 창고일 뿐. 무슨 대접을 더 바랐던 걸까? “박수혁, 박씨 집안의 며느리, 박수혁의 아내, 이런 타이틀에 이제 관심 없어. 그래, 마지막으로 해줄게. 마침 나도 그 여자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소은정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 소은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수혁은 짜증이 치밀었다. 그가 완벽하게 통제해 왔던 여자가 이제 벗어나려 하고 있다. 3년 동안 살면서 박수혁은 자신이 소은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결혼 전의 헌신적인 사랑, 결혼 후에 보여주던 순종적인 모습, 그나마 박수혁이 소은정을 곁에 둔 이유이기도 했다. 요즘 서민영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헌혈을 요구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는 박수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군말 없이 따라나서는 소은정을 보며 어떻게든 보상을 해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목적이야 어떻든 3년간 소은정은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아내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혼이라니. 물론, 이혼 따위가 그에게 타격을 줄 일은 없지만 말이다. 박수혁은 마음속에 드리운 짜증을 떨쳐내려 애썼다. 됐어. 어차피 힘들어지면 다시 돌아와서 애원할 테니까. ...... 소은정은 박수혁을 남겨두고 택시를 잡아 훌쩍 떠나버렸다. 병원에 도착한 소은정은 곧바로 서민영이 입원해 있는 VIP 병실로 들어섰다. 의사, 간호사들이 잔뜩 모여 서민영을 상전처럼 모시고 있었다. 소은정이 병실에 들어서자 서민영의 눈동자에 갑자기 생기가 어렸다. “은정 씨, 왔어? 화난 건 아니지? 미안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자꾸 신세를 지게 되네. 은정 씨도 힘들지?” 소은정은 차가운 얼굴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문자, 당신이 보낸 거지?” 확신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러니 굳이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소은정은 손을 들어 서민영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아악!” 서민영은 뺨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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