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아아니, 수건을 당기면 어쩝니까!”
눈앞의 광경에 당황한 여름은 얼른 눈을 가렸다. 그런데 손에 하얀 수건이 들려있는 게 아닌가!
‘설마⋯⋯ 당황한 나머지 내가 수건을 잡아당겼나?’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상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강여름 씨, 당신처럼 후안무치한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여름은 울고 싶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러그에 걸려서 미끄러진 거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만. 핑계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닙니까?”
최하준은 여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여름은 자포자기한 듯 털어놓았다.
“너무 퍼펙트한 바디를 보니까 뇌 정지가 와서 그만⋯.”
최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한다고!
“그래서 지금 날 탓하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아직 ⋯.”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겁니까. 나가세요.”
최하준의 태양혈이 벌떡거렸다. 최대한 화를 참는 중이었다.
“아, 알겠어요. 나가요. 나가면 되잖아요.”
여름이 허둥지둥 나가려고 했다.
“잠깐!”
뒤에서 짜증이 폭발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은 주고 가시죠.”
손을 내려다보니 수건이 들려있었다.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와 수건을 최하준의 품에 안겼다.
여름의 시선을 보고 최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뻔뻔하다니까.’
여름은 문을 ‘쾅’ 닫고 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귀까지 빨개졌던데 부끄러워 하는 건가?
어쨌든 귀엽네.’
그런 일을 겪고 나자 계속 거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여름은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얼마나 있었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숨을 고르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자는 중이에요. 내일 얘기 해요.”
“잔다면서 어떻게 대답합니까?”
상대의 저음이 들렸다.
“억지로 열기 전에 문 여시죠.”
밀려드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다가 여름은 결국 문을 열었다.
최하준은 회색 잠옷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목욕 후 나는 은은한 바디 샤워 향이 상쾌했다.
아직 겨울도 아닌데 목까지 꼭꼭 잠근 단추가 꽤나 의미심장했다.
“뭘 봅니까?”
여름의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고 화를 냈다.
최하준이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자 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것도 안 봤는데요.”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요.”
최하준은 고개를 숙여 여름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각도에서 보니 가느다란 목선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저녁 노을 같은 조명 덕인지 더욱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시선이 더 아래로 향하니 얇은 면 잠옷의 네크라인이 보였다.
최하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는 그쪽은 뭘 보시는 데요?”
같은 질문을 여름이 던졌다.
상대의 시선이 따가웠던지 민망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옷섶을 당겨 가렸다.
최하준은 웃음이 터졌다.
“지금 날 유혹하는 겁니까?’
“⋯⋯”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던 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닌데요⋯.”
여름이 입을 비죽거렸다. 피부가 뽀얀 것이 귀여웠다.
최하준은 시선을 거두더니 다시 예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비용은 제가 댈 테니 방을 새로 얻으시죠. 남녀가 이렇게 같이 사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름을 내쫓으려는 수작이었다.
여름이 다급히 외쳤다.
“뭐가 좀 아니에요? 혼인신고도 했고, 이제 명실상부한 부부인데요.”
최하준이 픽 웃었다.
“왜 혼인신고를 해야 했는지는 대충 아실 텐데요.”
그 말을 듣더니 여름이 수줍은 듯 웃었다.
“바에서 제가 첫눈에 반해서 결혼하자고 매달렸잖아요.”
최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
그날 밤 귀신에 씌인 게 틀림없었다.
여름이 갑자기 말했다.
“알겠다. 아까 그거 때문에 그래요? 손해 본 것 같은가 보지요? 그럴 수 있죠.”
여름은 뭔가 결심한 듯 비장하게 말했다.
“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어요?”
그러더니 잠옷 맨 위에 있던 버튼을 풀었다.
최하준은 ‘헉’ 하더니 급히 문을 닫고 나갔다.
여름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아무것도 안 보고 나가버린 최하준을 생각하고는 웃었다.
그 정도면 군자라 부를만했다.
‘저런 남자도 흔치는 않지.’
******
단잠을 자던 여름은 한밤중에 ‘야옹야옹’ 소리에 잠이 깼다.
나가서 불을 켜보니 지오가 테이블 아래 엎드려 토하고 있었다.
“지오야!”
여름이 깜짝 놀라 지오를 안으려는데 뒤에서 최하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요.”
여름이 뻘쭘하게 서 있는 동안 최하준이 지오를 안아 올렸다.
불빛 아래 비친 그의 옆모습은 사뭇 차가웠지만 늘어진 검은 머리 아래 두 눈에는 다정한 빛이 어려있었다.
“왜 그래요?”
지오가 아픈 모습을 보고 여름은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이러냐니?”
최하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름을 노려보았다.
“고양이 아닙니까. 아무거나 먹여도 괜찮은 줄 알았습니까?”
여름은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전에 봤던 길냥이들은 사람들이 아무거나 줘도 다 잘 받아 먹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지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여름을 한 번 노려보더니 최하준은 열쇠를 들고 지오를 데리고 나갔다.
여름이 얼른 따라가 엘리베이터를 잡으며 초조한 듯 말했다.
“아는 동물병원이 있어요. 같이 가요.”
상대는 여름을 본체만체했다.
엘리베이터가 주차장에 멈추자 최하준은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차 있는 곳에 도착해 여름이 보조석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누가 여름을 홱 잡아당겼다.
여름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최하준이 차 앞쪽에서 차갑게 말했다.
“당장 나가시죠. 돌아왔을 때 내 집에서 눈에 띈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러더니 지오를 안고 차에 올랐다. 최하준의 차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컴컴한 주차장에서 여름은 차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종일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쫓겨나기만 한 날이었다.
‘우리집’이라고 생각했던 곳도 이제는 돌아갈 집이 아니었다.
오직 이곳에서 지오만이 여름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는데,
이제는 이곳조차 허락되지 않다니⋯.
그러다가 괴로워하던 지오를 떠올리니 마음이 아팠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존심마저 버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지오까지 아프게 만들었다.
정말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